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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공탄 2개 그리고 빨래판

0 개 1,533 오소영

백발이 성성한 칠십대 사촌동생이 늙은 누나를 부추겼다.

 

자기 부모님들 옛날 행적이 궁금해서 알고 싶어 했다. 일찍 저 세상 가신 아버지의 한(恨)이 아직도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내 가슴도 뭉클 해 왔다. 그 분들은 나의 숙부모이기 때문이다.

 

1.4후퇴 당시 제 2 국민병으로 나갔던 삼촌이 종전 얼마후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부대가 해체되자마자 부산 자갈치 시장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피난지에서 돌아와 남편의 생사가 궁금했던 숙모는 한걸음으로 달려 내려갔다.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왔다.

 

아침에 눈만 뜨면 속이 메슥거려 밖으로 뛰쳐 나와야만 했다. 방 옆에 딸린 가계에서 순대 삶는 냄새 때문이었다.

 

한강에서 길이 끊겨 임시로 얻은 방 하나가 그렇게 괴로움을 주었다. 아이들 여럿중에 항상 유난을 떨었던 민감한 아이는 정말 힘이 들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 사정을 읽기라도 했을까? 어느날 부산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나를 내려보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매일 엄마를 졸랐다. 이것 저것 생각 해 보지도 않는 철부지였다. 마냥 멀다는 그 곳에 기차타고 떠나보고픈 마음 뿐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어른 팔뚝만한 민어를 사서 대야에 이고 왔다. 식구들 보양탕이라도 끓이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가미와 꽁지를 새끼줄로 마주 묶어 손잡이를 만들었다. 그 민어는 다시 엄마의 손에 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며칠 후 만면에 희색을 띤 엄마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놀래서 소리칠뻔 했다. 처음보는 기차표 였다.

 

“네 고집에 내가 졌다. 조역집에 민어 사다주고 부탁했어”

 

역장 다음이 조역인데 그의 집이 우리 이웃에 있어 다행이었다고 생색을 내는 엄마.

 

어린 계집애 혼자 어찌 그 먼 곳엘 보내느냐고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딸사랑이 특별했던 아버지의 너무나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 특별함으로 분명 믿어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사춘기 꿈을 잃은 소녀는 밤마다 푸른 바다와 갈매기를 만났다. 부산 꿈을 꾸었다.

 

순대삶는 냄새를 자갈치의 생선 비린내로 대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고기잡이 배가 지천으로 드나드는 한강 나루터에서 자란 아이에게 생선 비린내는 차라리 고향 냄새였기 때문이다. 어렵게 구한 기차표가 아까웠는지 엄마는 무조건 딸의 편을 들어주었다.

 

기차여행... 그건 내가 동경했던 낭만의 여행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지옥여행이었다. 발 디딜 틈없이 짐짝처럼 실린 사람들 속에서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장장 열 몇시간 만에 도착한 부산.

 

쌈박한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짓눌렸던 가슴이 뻥 뚫려 살 것만 같았다. 무조건 자갈치 시장을 찾아갔다.

 

한바퀴 두바퀴 장바닥을 다 뒤져도 숙부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왠일일까? 불안하고 초조했다.

손에 쥔 편지봉투를 보면서 ‘남부민동’으로 향했다.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은 작은집들. 판자집들의 난민촌이었다. 문득 만화속에서 본 인형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살면 재미있을 것 같아 키득거렸다.

 

그날따라 장사를 쉬었다는 숙부가 깜짝 놀래며 맞아주었다. 삼 사일 정도. 손님 대접을 받았다. 엄밀히 말해서 살림을 배운 실습시간이 맞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두 분은 벌써 장에 나가고 없다. 네 살박이 동생을 깨워 아침을 먹고 일과가 시작되었다. 방에 딸린 부엌하나. 치울 일은 별로 없지만 아이를 맡은 식모였다. 

 

숙모가 사 들고 온 반찬거리로 저녁을 준비하는게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소꼽장난처럼 조물락거려 만들면 맛있다고 먹어주는 그 분들이 있어 좋았다.

 

어느날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다. 벽지 사이사이로 방 안 에 환하게 빛이 서렸다. 엉성한 판자틈을 비짚고 스며들은 달빛의 장난이었다. 마치 잠자는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며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난민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정이었다.

 

숙부님 장사가 잘 되는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여러개의 금가락지를 허리띠에 촘촘히 넣어서 내 허리에 둘러주었다. 집이 허술하니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그 숫자가 나날이 늘어가서 무게를 느낄만큼 허리가 두툼해져 갔다.

 

“작은 엄마 나 이거 가지고 도망가면 어쩌려구요...”

 

나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는 은근한 과시였을까?

 

지겹게 하기 싫은 일이 하나 있었다. 연탄불 갈기... 처음으로 연탄불을 대했을 때 그 편리성에 탄복을 했었다.

 

매 때마다 불을 피우는 귀찮음이 없고 늘 불이 있으니 아무때나 무얼 하기가 그리 쉬웠다. 그러나 새 연탄을 갈아넣기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 때는 우리가 보통 쓰던 연탄 십구공탄이 아닌 구멍 아홉개짜리 구공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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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이 없어서 재로 테두리를 꽉채운 가운데 새 탄을 얹고 불이 당겨지면 위에서 힘껏 눌러 밑으로 재를 긁어내야 했다. 부서진 재를 다 긁어내려면 집 안이 온통 뽀오얀 재로 뒤덮혔다. 새 탄을 갈아야 할 시간을 놓쳐 불씨를 잃어버린적도 여러번이었다. 번개탄이 있을리없으니 나무를 주어다가 한나절을 연기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진짜로 울기도 했었다.

 

산 밑 가계엔 가운데 구멍에 새끼줄이 끼워진 연탄들이 줄을 서 있다. 한 개씩 들고가기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삶들. 일을 마친 남자들이 양 손에 들고가서 하루 하루를 살았다. 여자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편편한 송판뙤기나 빨래판에 얹어서 머리에 이고 다녔다. 기운좋은 어른들은 3개위에 2개를 더 얹어 5개를 이는 사람도 있었다.

 

두툼한 똬리로 빨래판을 이고 가계앞에 앉으면 주인이 연탄 2장을 조심스럽게 얹어주었다. 중심을 잘 잡아주는게 노하우였다. 좁은 골목 비탈길을 똑바로 걸어야 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혼자서 내리기는 더 어려웠다. 늘상 손에 얼굴에 옷에 검댕이를 묻혔다. 그 무게에 짓눌려 한참 자랄 나이에 키도 못 크고 오그라들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겼다.

 

올 때 처럼 돌아갈 날을 손꼽았다.

 

바다위에 유유히 뜬 배를 보면서 집 생각을 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에 설거질은 언니 몫. 끽 해야 방걸레질이나 했던 내 꼴이 이게뭔가. 스스로 원했던 일이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때를 기다렸지만 속에선 부글부글했다.

 

두 분이 열심히 일할 때 나도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맘이 조급했다. 철이 들어가는 것이었을까?

 

언니가 시집을 간다는 통보가 집으로부터 날아들었다.

 

“너도 같이가서 언니 축하해 주고 와야지”

 

아 이제 살았구나! 부질없던 소녀의 부산 일기는 드디어 거기서 끝이났다.

 

수십년 연탄을 사용해 살아왔지만 머리에 이어본 것은 그 때 뿐이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머리밑이 짓눌려서 아픈것 같다.

 

‘남부민동 판자촌’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 곳에 다시 한번 가 보고싶다.

 

누나의 치마자락을 꼭 잡고 따라다녔던 그 때의 네 살박이 동생이 백두 (白頭)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참 옛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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