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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명사칼럼 0 553 2019.06.26 16:59

“올해 다들 환갑이라며?” 국어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원탁에 둘러앉은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네” 라고 답했다. 선생님 말씀 잘 듣던 모범생의 목소리도, 그렇다고 번번이 학칙을 어기던 문제아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질문 아닌 질문에는 제자들을 대견해하는 마음이 묻어났고 우리들의 어색한 대답에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사제지간의 저 짧은 문답에는 저마다 지나온 40여년의 우여곡절이 녹아들어 있을 터였다. 

 

지난 5월 하순,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의 한 음식점. 미국에서 일시 귀국한 국어 선생님과 은퇴하고 인천에서 살고 계신 영어 선생님을 모신 조촐한 자리였다. 중학교 때 은사 두 분이 이제 막 육십 줄에 들어선 제자 여덟 명과 빙 둘러앉았다. 우리들은 앞다투어 열서너 살 중학생으로 돌아갔고 팔순에 가까운 국어 선생님과 칠순에 접어드는 영어 선생님은 경기도 김포(현 인천 서구)의 남녀공학 중학교의 젊은 여교사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동창회처럼 은사와 함께하는 자리도 몇 가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서로 근황을 나누고, 참석하지 못한 선생님과 동창생의 안부를 묻고 나면 이른바 팩트 체크(사실 확인)에 들어간다. 주로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는 구도인데 묻는 자가 승리할 때가 많다. ‘선생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 라고 제자가 물으면 선생님은 ‘내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라며 머쓱해하신다. 

 

1970년대 초반 삼십대 초반이던 국어 선생님은 까칠하셨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찬바람이 부는 듯했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들이 “선생님, 너무 깐깐하셨어요” 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라며 미소를 지으셨다. 몇 년 전 서간문 형식으로 쓰기도 했지만 내게 국어 선생님은 각별하다. 여름방학 때 평생 잊지 못할 숙제, 훗날 나를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이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 외어오라는 것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숙제를 다 해간 사람은 반에서 나 혼자였다. 

 

20여년 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왜 그런 숙제를 내주셨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약간 섭섭했지만, 그건 선생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부터 강의를 했다면 선생님의 답변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뒤늦게 대학 강단에 서고 보니 ‘교사의 기억상실증’은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나도 졸업생들로부터 ‘그때 왜 그러셨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때마다 답을 내놓지 못해 쩔쩔맨다.

 

이런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지하철 승강장 벽에 걸린 액자에서 어느 철학과 교수님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가끔 연구실로 졸업생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당신이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친 철학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대신 교수님한테서 들은 농담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원로 철학자의 회고담 앞에서 새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내 앞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단편소설 한 편을 다 외우라는 국어 선생님과 평생 철학을 강의한 교수님은 교육자로서 서로 다르지 않다. 자신의 교육철학에 따라 자신의 방식으로 가르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이다. 만일 내가 여름방학 숙제를 하지 않았다면 나의 문학적 감수성은 발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철학과 졸업생에게는 플라톤의 통찰보다 교수님의 농담 한마디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교육은 이 대목에서 난감해진다. 교수자와 학습자, 교육 목표와 학습 효과 사이의 이 불일치를 어찌할 것인가. 

 

나는 교육과 학습 사이의 간극이 더 커지기를 바란다.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가 임계점에 도달해야, 다시 말해 학교•교수•학생 사이의 불일치가 극에 달해야 교육의 자발적 전환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반세기 전 우리 선생님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심각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압도적인 시대정신이었을 때 누가 지구 온난화와 과학기술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었을까. 설령 누군가 나섰더라도 다들 외면했을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요즘 내가 붙잡고 있는 화두다. 우리는 윗세대, 특히 근대교육으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왔다. 하지만 풍요와 편리를 과도하게 추구한 결과, 경제 성장이 유일한 미래라고 믿어온 결과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있다. 지구 생태계는 교란되고 인간 내면은 황폐해지고 있다. 물려받은 것을 그대로 물려줄 수 없는 ‘거대한 단절’ 이다. 좋은 삶, 공정한 사회, 지속 가능한 문명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미래세대에게 자신있게 말해줄 수가 없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두 분 은사를 뵙고 나서 누군가의 은사일 나는 더욱 난감해지고 말았다.               

[*경향신문 발췌] 

 

■ 이 문재의 시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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