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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갑’이었다. 자유직업인 탤런트들은 오로지 드라마에 출연해 출연료를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연출자들은 ‘갑’이다. 선택을 받아야 하는 탤런트들은 보편적으로 ‘을’이다. 그러나 인기 스타가 되면 그때는 달라진다. ‘갑’이 된다. 작품을 골라 출연할 수 있고 개런티도 본인이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비스타들은 일반적으로 연출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 스태프들도 작품 당 계약을 한다. 그래서 그들도 선택받는 직업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특별히 기술이 뛰어난 스태프들은 연출자들이 서로 같이 작업하려고 경쟁하는 수도 있다. 이때는 그 스태프들도 ‘갑’이 된다.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연출은 캐스팅 권한으로 인해 ‘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기 있는 작품에 출연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으며,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게 해주는 조력자도 역시 연출자다. 그래서 연기자들은 연출자들을 보면 커피 한 잔이라도 같이 마실 수 있었으면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잡아두려고도 한다. 연출자들에게 유혹은 늘 있기 마련이고, 또 엉뚱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운동권 출신의 모 국회의원이나 항공기를 회항시킨 모 재벌 딸처럼 시건방진 ‘갑질’을 일삼는 PD도 있고, ‘금품수수와 여자탤런트와의 스캔들’로 패가망신한 연출자도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많이 정화되었지만 이로 인해 연출자들에 대해 탤런트들 등이나 쳐 먹고 사는 나쁜 이미지가 형성된 시절도 있었다. 어쨋든 연출자가 탤런트들의 생계를 쥐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갑’인 연출자들은 거기에 따른 책임이 있다. 누구라도 캐스팅할 수 있고, 어떤 작품이라도 할 수 있지만, 실패했을 경우, 그는 ‘갑’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을’인 탤런트들에게는 그런 책임이 없다. 작품이 잘되든 못되든 상관없이 많이 출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생계수단이 되니까.
그러나 갑은 갑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중요한 덕목을 잃게 되고 비아냥과 경멸이 따른다. 영원한 갑은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탤런트 P와 J는 주로 단역만을 해왔다. 젊었을 때는 연출자들을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잡심부름도 하며 놀이 삼아 별 불만 없이 어영부영 지냈지만 나이가 들고 자식들이 커가면서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벌이는 시원찮고 머리도 희끗희끗해져 가면서 그런 단역을 하기에는 남들 보기에도 창피할 뿐더러 자식 같은 연출자에게 굽실거리기가 뭐하니까,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술집 같은 걸 했다. 실내에 젊었을 때 사진도 붙이고, 단역이지만 드라마 스틸로 실내를 도배하다시피 하며 시작을 했지만, 초기에 누구누구 소개로 한번씩 들여다보고는 끝이었다. 빚만 지고 말았다. 그러다 그는 끝내 연기다운 연기, 배역다운 배역 하나 못 맡고 타계했다.
여자 탤런트인 경우는 대체로 얼굴만큼은 평균 이상이 되니까 시집만 잘 가면 자존심을 살리면서 살 수 있지만, 남자들의 경우는 참 난감해진다. “이게 아닌데…….” 하고 후회하고 깨닫는 순간, 이미 때는 늦는다. 직업을 바꿀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는 늦은 시간인 것이다. 평생 누군가에 의해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의 비애다. 예능 계통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은 곤란하다. 온리 원(Only One)이 생존이 가능하다. 적자생존의 본보기다.
그러함에도 탤런트를 모집하면 수백 명이 몰려온다. 모두들 찬란한 꿈을 안고 남들은 안 되어도 나는 될 것이라는 가망 없는 희망을 안고.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이벤트조차 없다. 무슨 무슨 기획사니 엔터테인먼트 회사니 하면서 전문적으로 탤런트들을 키운다. 이제는 그들이 ‘갑’이다. 그들은 투자해서 키운다. 얼굴도 고쳐주고 의상도 마련해 주고 차도 사준다. 연출자들도 그들에게 캐스팅을 의존한다. 과거에는 길거리 캐스팅이라 해서 우연히 연출자에게 발탁되어 탤런트가 된 사람도 있지만 방송국에서 뽑는 탤런트시험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방송국에서 뽑으면 방송국에서 교육시키고 자국 프로에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준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제도는 없다. 처음부터 매니저가 붙어다니며 첫 출연부터 로비로 시작한다.
건전한 드라마를 만들 의무가 있고 그 기본이 되는 우수한 연기자를 키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 방송국이 이런 기초인력 양성마저도 자본의 논리에 맡기고 수수방관하고 있다. 흥행의 논리다. 드라마 역시 문화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 결정된다. 시청률을 올려도 돈 많이 버는 연출자는 명장이라고 치켜세우고 작품성 운운하는 연출자는 도태되고 만다.
앞으로는 ‘스타’는 있어도 ‘배우’가 없는 시대가 올 것이며, ‘드라마’는 있어도 ‘작품’은 없는 시대도 올 것이다. 벌써 그런 조짐이 뚜렷하다. 연출자는 이제 더 이상 ‘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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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기오
- KBS 대PD 드라마국장 역임
- TV문학관 ‘금시조’, ‘홍어’,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 & 대하드라마와 특집드라마 47편 연출
- 제 1회 프로듀서상, 제 25회 백상예술대상, 1989년 독일 Futra상, 제10회 상하이 TV 페스티벌 백목련상 등 다수 수상
- 2004년 현대수필 등단, 국제펜문학 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 신곡문학상, 윤오영문학상 수상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의 강물은 흐른다>>, <<장기오의 드라마론>>, <<TV드라마 연출론>>, <<TV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읽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