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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0 277 2019.03.14 10:34

4년간 생활하던 장소를 떠나 또 다른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도톰하게 쌓여있던 떠깨비같은 먼지를 털어내야자니 긴 시간동안 쌓아왔던 애정을 떨구어 내는것 같아 마음이 서운했고, 지워지지 않을것만 같던 싱트대 얼룩을 깨끗하게 닦아내고나니 닳아진 수세미 끝으로 학생들의 기억마저 닦여나간듯 싶어 아쉬웠습니다.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손때가 묻은 온갖 사무용품들과 실험기구들을 정리해서 차곡차곡 쌓아놓고는 한 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느 한 곳, 어느 한 물건도 특정한 학생이나 사건을 연상시키지 않는 것이 없는걸 보면 지난 4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 우여곡절의 집합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제 이렇게 공간을 비워내고 나면 새로운 공간을 채워야 할테고, 이 곳에서 했던 모든 작업들을 새로운 장소에서 역순으로 되풀이 해야 하겠지... 

사람 사는것이 그런가보다. 채울때가 있으면 비울때가 있고, 채워야 할 곳이 있으면 비워야 할 곳이 있고..’

 

생각은 그렇게 공간을 떠도는 먼지처럼 하릴없이 시간을 유영하는데 담 결린 등짝과 찌릿거리는 손목은 이제 좀 쉬었다 하라며 아우성을 치네요. 다시 한번 느끼는 일이지만 참 손도 많이가고 허리도 아프고 신경 쓸일도 많은 것이 ‘이사’인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변의 사장님들께선 혼자서 아둥바둥 허둥지둥하는 절 보시며 이사를 만류하시기도 했었습니다. 어느분은 이제껏 힘들여 이름을 알려놓고선 뭐하러 장소를 옮기려 하느냐고 호통을 치시기도 했고 또 다른분은 여기나 저기나 다 거기서 거기.. 다른곳으로 간다 해봤자 별 볼일없을거라며 그냥 있던곳에서 계속 버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분명한 이유와 한계가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위해선 또 다른 장소로의 이전이 필연적일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그동안 주변에 나쁜 모습으로 비쳐지지는 않았었는지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구지 눌러 앉히려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했습니다. 밉상으로 비쳐졌었더라면 떠나는 제 뒷모습을 보시며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 하셨겠지요. 

 

여러 지인들의 말씀을 듣다보니 곰곰히 되새김질할만한 이야기들도 들을수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니다. 

 

‘사장님 이사오면서 이 건물에 입주자들이 줄줄이 들어섰는데.. 그렇게 상권을 살려놓고서 이제 나가시면 어째...’

 

글쎄요. 처음에 그 말씀을 들었을때엔 그저 뒷머리만 긁적거리며 ‘제가 뭐 한일도 없는데 무슨 상권을 살렸다고 하세요..’ 하며 계면쩍어 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의도하지 않았었다 하더라도, 제가 별도의 시간을 들여 노력하지 않았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상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면이 없지는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제가 이사 들어오고 난 후 한 동안 이곳저곳의 공사소음 때문에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있는데요. 새로 꾸미는 사업체를 단장하느라 발생하는 소음이 꽤 자주 들렸던걸 보면 그 분의 말씀이 영 허튼말씀은 아닐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상권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목에 힘 좀 주려는 의도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왁자하게 싸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소란함과 실험이다 작업이다 하며 쿵쾅거린 일들을 생각하면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피해를 끼친것은 아닐까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상권형성에 공헌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먼저 자리를 차고 앉아 이 상가가 한번 들러볼만한 곳임을 보여준 ‘모험’ 때문입니다. 

 

어느 선발주자에 의해 건물의 유동인구가 많아지면 인근의 비어있는 상가들도 조금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썰렁한 빈 집 보다는 똑 같이 낡았지만 누구라도 살고 있는 집이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까요. 한명 두명 상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점점 입소문이 퍼져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장소가 되다보면 언젠가는 사업을 시작하기위해 장소를 찾고있던 누군가가 빈 자리를 보게될 것이고, 이미 형성된 유동인구와 구매력을 바탕으로 상가임대를 결심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가를 찾는 손님들은 계속 불어나 결국에는 상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며 지친몸을 쉬고있다가 문득 눈을 돌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상담테이블을 바라보았습니다. 4년간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던 테이블은 수 많은 학생들의 고민을 들었고 부모님들의 염원을 들었고 누군가의 성공담과 또 다른 누군가의 뼈아픈 실패를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입 꾹 다물고 아무말 없는걸 보면 상담테이블도 여간 입이 무거운게 아닌듯 합니다. 살짝 저물어가는 하루해를 등뒤로 넘기며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거의 최초로 그 곳에 앉았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앉았던 R이 떠올랐습니다. 어쩐지 R과 함께 지내온 시간과 상권이 형성되어 온 과정이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어서였던듯 합니다.  

 

R은 아주 똘망똘망한 아이였습니다. 저와 햇수로 4년을 같이 지내고 올해 대학에 입학했으니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명민함은 성숙한 ‘지성’ 이라기 보다는 천진난만한 ‘똘똘함’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번쩍들어 질문을 할 때면 ‘아구 아구..’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귀여운 아이였지요. 그랬던 아이가 이제 훌쩍커서 대학생이라니... 그 4년의 시간동안 R은 키도 훌쩍 컷고 양볼에 도톰하던 젖살도 홀쭉하게 빠져 갸름해진 것이 누가뭐라해도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아마 저는 보통 아빠들이 느끼는 ‘우리애가 벌써 이만큼 컷나..?’ 하는 뿌듯한 생경함을 몇 곱절 더 느끼며 사는듯 합니다. 제 아이들이 아닌 다른 집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말이지요..ㅎㅎ

 

얼마전 영국으로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잠시 들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0대 중반이라는 민감하고 섬세한 시기를 같이 살아낸 한 명의 동지를 바라보는 눈으로 R은 저를 바라보았고 저는 한 어린아이가 자라가며 재능을 보이고 그 작은 명민함의 편린이 성장하고 성장해 두각을 나타내는 과정을 조망하는 마음으로 R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지난 일들의 회상으로 점철하는 동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을 되 짚어 흘러서 저와 R이 최초의 결단을 하던 시간으로 역류했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그렇게 마주앉아 있었고 그때도 우리 주변엔 어수선하게 늘어서있는 박스와 짐들로 분위기가 차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라면 이사 들어오는 짐과 이사 나가는 짐의 차이정도랄까요. 반대편에 앉아있는 R의 모습과 배경이 어우러져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장면처럼 R은 그 자리에 오두커니 앉아 한 순간에 자란난것만 같았습니다.  

 

‘4년전 우리는 오늘을 이야기했고 오늘 우리는 4년전을 이야기하는구나’

 

‘그러게요.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나요’

 

우리의 처음 만남과 그날의 마지막 만남 사이엔 과연 어떤 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을까요..

하나하나 신경써서 기억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과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고 마는 한 사람의 역사와 사건들은 마치 꼬투리에 알알이 들어찬 완두콩과도 같은듯 합니다. 인과의 논리속에 한줄로 늘어선 듯 하다가도 자세히 살펴보면 딱히 연결된 고리를 찾기가 어려운, 실로 애매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래서인지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들은 분명히 힘들었으나 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분명히 뿌듯했으나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운 단단하게 뭉쳐진 구름과 같은 형태로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단지 확실한 것은 R이 이루어내었던 가시적인 결과들이 오늘의 R을 있게 한 전부는 아니라는 것 뿐이라 할까요.   

 

첫날 R을 만났을때, R은 자신이 선택할 IB라는 과정이 어떤 과정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몇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학교공부외에 별도로 해야할 활동이 얼마나 되는지, 과목당 부여된 시험외의 평가가 무엇 무엇 인지.. 하지만 부족한 사전 정보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IB를 공부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었고 어떻게 해서든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어느학생보다도 강했던듯 합니다. 

 

우선 R은 Y11의 학교 교과과정을 저의 도움없이 혼자서 공부해나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원에서 배우고 공부해야 할 과정은 IB준비를 위한 과정이어야 하지 Y11 성적을 위한 과정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별다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R을 바로 IB준비반으로 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민했습니다. 어떤 과목을 이 아이의 전략과목으로 삼아야 할까..? 어떤 과목들을 미리 학습시켜야 IB코스에 들어섰을때 두각을 나타내고 더불어 학습시간을 절약하는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고민은 R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의외로 쉽게 해결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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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물리와 화학을 수강했는데 두 과목에 골고루 흥미를 보였지만 특히 물리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묘사하는 상황이 어떠한지 간파하는 능력도 뛰어났고 현실적인 예시에 접목시킬 물리적 이론을 선별하는 능력도 나름 우수했으니까요. 물론 재능이 잉태한즉 관심을 낳고 관심이 장성한즉 집착을 낳는 법이라서 약간의 지나친 몰입이 우려스러울때도 있었지만 타고난 성향이 그러하니 그대로 인정할 뿐 어쩔도리가 없었지요. 그래서 R의 전략과목은 자연스럽게 물리와 화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리는 재능과 흥미가 있는듯 보여서 선택했고 화학은 물리학적 지식의 바탕위에 세워진 학문이어서 그 연계성이 깊기에 선택했습니다. IB준비과정을 하던 중 R은 조금 무력해지는듯 했습니다. 당장에 써 먹지도 못할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것도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보다 몇 곱절 어려운 내용을 머리 싸매고 공부한다는 것이 왠만한 동기부여 없이는 쉽게 해 나가기 어려운 일일테니 R의 무력감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R, 그리고 같은 반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IB준비과정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SAT Subject 시험을 치르도록 ‘강요’ 한 것입니다. 그러자 거짓말 같이 아이들의 무력감이 개선되었고 학습능률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배우는 이 내용이 몇 개월뒤 SAT subject시험에 출제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아이들은 다시 눈을 반짝였습니다. 특히나 R은 드디어 자신의 지식을 써먹을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하는듯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그 몇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R은 당연하다는듯 물리 SAT subject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왔고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IB수업에 들어간 이후 당연하다는듯 물리, 화학 고득점을 받아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처음엔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던 과목들에서도 점차 성적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전과목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2학년 말 저의 또 다른 ‘강요’에 의해 치뤘던 물리, 화학 NCEA 스칼라쉽 시험을 무난히 패스했는가하면 의대 지원생들을 위해 개설된 대학 1학년 과정까지 섭렵하고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제 이렇게 하나하나 기억해보니 아무런 연관이 없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던 R의 역사와 사건들이 어떠한 인과의 논리속에 한줄로 늘어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의 선두에 서 있는 첫번째 사건은 당연히 ‘IB준비반’ 수업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아마도 R은 ‘IB’라 불리우는 세계적인 교육과정의 간판 아래 휑하게 비워진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당황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무턱대고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결정은 했지만 아는건 하나도 없고, 게다가 다른 과정에 비해 어려운 것도 문제인데 해야할 TASK는 몇 배나 많고.. 그러나 R은 두려워하며 떨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R은 비어있던 자신의 내면세계에 서둘러 물리와 화학이라는 두 점포를 입점시켰고 발바닥이 닳도록 뻔질나게 그곳을 들락거리며 썰렁하던 상가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비어있는 상가들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이왕 들른김에 한발 더 디뎌보자는 마음으로 점차 영역을 확장하다가 급기야는 전체 6개의 점포를 북적거리게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상권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상권은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게되어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보조하며 성공적인 대학진학의 열매를 따 내고야 만 것입니다. 

 

R이 구축했던 이 상권이 최초의 한 점포, 한 과목에서 시작되었음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썰렁하고 황량한 빈 상가 건물에 최초의 한 걸음을 디디는 모험은 노력보다는 결심에 의해, 관찰보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결심과 행동으로 촉발된 모험은 우리학생들이 누릴 상권의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보증수표가 될 것이고 인생이 베풀수있는 선하고 좋은 것들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마음에 최초의 한 점포를 시작하는 결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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