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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보석같은 친구‘릴리앙’

오소영 0 579 2018.02.27 20:27

여름이 저만치 물러나면서 손짓해 불러들인 다음 손님. 가을이 왔다. 따가운 햇살속으로 안겨오는 바람이 제법 상큼하다. 

 

이 때 쯤일게다. 다알리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다알리아 꽃을 생각하면 문득 잊고 살았던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탐스럽게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언제나 반갑게 웃어주던 릴리앙.

 

그녀가 왜 그리 예쁜 이름을 가졌는지? 좀처럼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보다 더 예쁜 마음씨에 놀랬다. 생김은 아니어도 이름이 예뻐서 마음이 닮았는지... 변함없는 그를 이웃해 지켜보며 늘상 그런 생각을 했다. 그를 닮고싶어 부드러워지려고 나름 흉내도 내보며 노력도 했었다.

 

그녀가 떠나간지 오래 되었다. 정성으로 가꾸던 정원엔 지금 꽃 한포기도 없이 삭막하다. 메마른 땅에 낯선 ‘카약’이 얌전히 올라있다. 그 집 주인은 이제 호탕한 남자의 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문이 활짝 열린 빈 창고가 눈에 거슬린다. 주인없이 버려진 것이어서 더욱 을씨년스럽다. 볕이 따가운 한낮이면 뉘집 고양이들인지 길게 배를 늘어뜨리고 게으른 낮잠을 잔다. 이제 짐승들의 별장이 되어버린 창고. 릴리앙이 요긴하게 쓰던 작은 별채였었다.

 

그는 무슨 살림살이가 집에 넘치도록 많았는지 그 창고는 거의 옷장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시시때때로 나앉아 상자에 담긴 옷가지들을 추스르곤 했다. 아들 딸 살림살이라고 하면서이맛살을 찌프리는걸 보면 뭔가 느낌이 왔다.

 

결혼한 자식들이 제 앞가림 제대로 못하고 혼자사는 엄마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했다. 전부 버리고 싶다는 몸짓을 보면서 딱하기도 했다. 아침마다 세탁해 널어놓는 옷가지들이 빨래줄에 가득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내몫의 줄까지 모두 차지해 어느때는 그가 얄미울 때도 있었다.

 

나이도 많지않은 사람이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패여있다. 마음고생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가 자기 집에 초대를 해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벽에 걸린 대형 액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멋진 여인의 사진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만 그도 젊어 한 때는 무척 아름다웠던 여자였음을 알았다. 

 

검은피부의 퍼시픽 아일랜더인 릴리앙. 그가 마치 흑진주처럼 아름다웠다. 낯선게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까? 놀랬다.

 

무얼 했던 여인일까? 조금 궁굼해지기도 했었다.

 

무언가를 늘상 주고싶어 하는 넉넉함. 마음씨가 비단처럼 부드러워 가까이 하기가 편한 사람이었다. 늘 윗사람처럼 믿업기도 했다. 이 나라 생활에 서툰 내게 친절하게 알려주며 다독여 주었다. 아주 천천히 손짓 몸짓으로....

 

말이 통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고 안타까웠다. 외출할때 그와 마주치면 한결같이 ‘뷰티풀’을 외쳤다 손가락을 추켜세우고 브이자를 그려보였다.

 

“나야? 옷이야?”

 

호들갑으로 대응을 하면 그의 손짓 몸짓이 야단스럽다. 허물없는 내 주책도 어른처럼 잘 받아주는 그가 너무 정스러웠다. 검은 피부를 가진 그들 눈에 피부가 뽀얀 동양 할머니가 괜찮아 보였을까? 아마도 우리의 한국 의상이 돋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쇼를 하고 나오는 날은 온종일 마음이 부풋했다. 늙어가는 자신을 까맣게 잊도록 착각하게 만들어주던 릴리앙.

 

그녀는 검고 투박한 인상답잖게 정원에 넘치도록 아름다운 꽃을 심고 즐겼다. 늘상 손에 흙을 묻히고 살다가 저녁이면 가끔씩 외출을 했다.

 

댄스 파티를 좋아한다고 자랑을 했다. 그녀에게 댄스라니?... 왠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문화와 다른 차원에서 사는 사람들임을 미쳐 생각못했던 나였다. 맘에 드는 파트너가 있어 더욱 재미있다는 그녀.

 

잘 다녀오라고 하면서 내 맘이 불편해졌었는데 왜 였을까? 파트너라니. .. 후훗 내가 질투를 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부시게 새하얀 드레스에 흑단같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나서는 뒷모습이 아가씨처럼 멋이 있었다.

 

“릴리앙 뷰티풀!!!”

 

나도 브이자를 그려줬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십년너머 표정 하나로 그렇게 우리는 정을 키우며 살아가는 이웃이었다.

 

어느 날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쳐 놀랬다. 아무런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는데 어쩐 일일까?

 

정원에 핀 많은 꽃들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왜 떠났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사람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어디로 이사를 갔든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램만 갖고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멀리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났다는 말을 요즘 참 많이 실감하고 있다. 릴리앙이 많이 보고 싶다. 같이 식사조차 한 적이 없는 그에게 그토록 깊은 정이 들었던걸까? 까닭모를 슬픔이 목으로 차올라 견딜 수가 없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지가 얼마 전이다. 그와 늘 함께 하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 전해들은 소식이다. 많이 슬프다는 그 친구분을 위로 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내가 더 슬펐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내 발은 허공을 휘젓는 것처럼 맥이 빠져 있었다. 온종일 그녀가 눈앞에 어른거려 내 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늘상 기쁘게만 하던 그녀였다. 이렇게 나를 슬프게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는 이사를 간게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그 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자신을 꾸짖어도 보지만 소용없는 자책일 뿐이다. 눈만 감으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리없이 가까이서 도와준 고마운 친구. 릴리앙.

 

이역만리 낯선땅에서 혼자 살아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달려와서 도울게 없느냐고 자상하게 물어주던 여인. 낯선 문화에 익숙하도록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걸 시작으로 십년 넘은 긴 세월을 그들속에 코리안 혼자라도 지금까지 가볍게 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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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안에 그녀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내 것으로 익숙해 진 것들이지만 오래 전에 릴리앙이 선물해 준 것들이다.

 

볼륨좋은 갈색 꽃병에는 도드라져 나온 꽃무늬가 요란스럽다. 

 

소담스럽게 잘 핀 장미꽃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사기로 구운 목이 긴 병은 무슨 스포츠 행사 때 기념품 같았다. 양 손잡이가 있고 앞 뒤에 활력있는 운동폼의 무늬가 들어있다.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화병이다. 그것도 물론 내 작은 공간 한귀퉁이 멋을 내 주고 있다.

 

소파에 앉으려다 말고 다시한번 놀랬다. 붉은색 등받이 방석 두 개도 이제 릴리앙의 유품으로 남게되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뒷전에 밀려나 있는 츄립형 촛대도 그녀의 마음이었다. 내게 정말 필요치 않은 물건을 준 적도 있어 오랫동안 보관만 하다가 치운 것도 있었다. 나는 별로 준 것이 없는데 받은게 너무나 많았다. 이토록 미안한 사람을 만들고 먼저 가버린 야속한 여인.

 

모두가 그의 유품으로 생각되니 보기에 애잔하다. 그래서 그녀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유난히 다알리아 꽃을 잘 피워내던 그녀. 그를 나는 다알리아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 꽃이 흐드러졌던 정원에는 이제 쓸쓸함만 남아있다. 날렵하게 앉은 ‘카약’이 너무 낯설다.

 

그동안 맘놓고 자란 무궁화 나무만 키자랑을 하듯 지붕까지 가지를 뻗고있다. 밤이면 황홀하게 꽃들을 지키며 친구하던 정원주변의 전등대신 썰렁한 야외탁자가 멋없이 버티고 있다.

 

옛 주인을 잃고 잘못 만난 새 주인으로 인해 집이 사뭇 폐가처럼 황량해져 가고 있다. 집하고 여자 하고는 가꿀 탓이라고 했는데... 맘씨 좋은 사람이 왜 그리 세상을 빨리 버렸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외출하면서 문득 그 집으로 시선이 보내졌다. 환하게 웃고 반겨주던 릴리앙은 있을 리가 없다. 시뻘겋게 웃통을 내놓고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남자가 창문 안쪽으로 보였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사람 카약 아저씨였다.

 

하늘 나라에 가서도 꽃을 가꿀것만 같은 고운 사람. 릴리앙.

“미안해요. 많이 늦었지만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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