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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010. 12:54 NZ코리아포스트 (219.♡.23.25)
왕하지의 볼멘소리
요즘은 손목까지 아파서 컴퓨터 자판 두드리기도 힘들 때가 있다. 어깨와 팔도 아프지만 허리도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는 가끔 안마를 받았지만 이곳에서는 아는 곳도 없고 더욱이 머니가 없지 않은가, 한국에선 안마도 잘해주던 아내가 뉴질랜드에 온 후로는 국물도 없다. 이걸 보고 설상가상이라고 하는가,
그러니 허리 좀 밟아 달라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거실 바닥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아내가 지나갈 때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허리라도 즈려 밟아주고 가시옵소서...”라고 시를 한수 읊는다. 그래보았자 징검다리 건너듯 두어 번 밟아주고 가버리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지난 주말은 너무 분주했다. 왕가레이시의 ‘겨울아트 쇼’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동양화를 전시판매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싸게 팔라는 것이었다. 화선지를 배접해 줄 수도 없는 일, 내가 아는 키위들도 선물 받은 서예나 그림들을 꼬깃꼬깃 접은 채 보관하고 있는데 걸어놓지도 못하는 그림이 뭔 의미가 있겠는가, 특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어 더욱 걱정스러웠다. 손이 덜덜덜 떨리면 어쩌나...
생각 끝에 두꺼운 화선지를 작게 잘라 나무와 참새, 연잎과 오리, 꽃과 나비 등 간단한 그림을 그리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요구사항도 참 많았다.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나온 마오리청년은 2마리 참새사이에 새끼참새를 더 그려달라고 요구했고 ‘행복한 가족’이라는 글씨를 한글로 써 달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한글이 너무 아름답다고 한글을 써 달라고 줄을 서는 것이다. 한문은 오클랜드에서 왔다는 중국여자만이 매화(梅花)그림에 자기이름인 매자(梅子)를 써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놀라운 것은 동물원에 원숭이 같던 내 모습이 마치 몽마르뜨 언덕의 불란서 화가처럼 능숙했다는 것이다.
“아빠, 그림을 즉시 그려 주려면 스케치를 많이 해 놔요.” 아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 할 때 나는 붓 가는대로 그냥 그린다고 했다. 내가 그림을 빨리 그리자 옆에서 통역을 하는 아들이 사람들이 자세히 볼 수 있게 그림을 천천히 그리라고 했다. 화가라는 키위 할머니는 아들과 한참 대화를 하는데 이런 말도 하는 것 같았다.
아아, 붓이 한번 지나가면 꽃에서 향기가 흐르고 붓이 또 지나가면 새 울음소리가 들리는구나...
“사실 아빠가 붓 가는대로 그린다 해서 좀 불안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 해,”
“그게 아마... 네 엄마 잔소리를 극복하고 그림에 집중하다보니 내가 경지에 다 달은 것 같다. 다 네 엄마 덕분이지... 너도 엄마 잔소리를 고깝게 생각하지마라, 아빠처럼 그걸 다 이겨내면 도통할 수 있다.”
그나저나 전시된 그림은 몇 점 안 팔리고 싸구려 그림만 무지하게 팔렸으니...
“아빠, 금액으로 따지지 말고 그림 수로 따져봐 70장 넘게 팔았어, 사람들이 그림 사러 온 게 아니라 쇼를 보러 온 거야.”
아들 이야기로는 화가들도 많이 만났고 그림 주문한다고 명함도 가져갔고 전시회 하자고 제의하는 사람도 몇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몇 장이나 사간 싱가포르 아줌마가 또 찾아와서 큰 종이에 한글을 써 달라 했다면서
“아빠, 그 아줌마가 시내서 안마소를 하는데 사무실에다 걸어 놓는대. 그래서 작품 값은 안 받고 대신 아빠 안마해 주기로 약속했어.”
“진짜냐? 근데, 술가게 주인은 안 왔냐? 술하고 바꿔 먹으면 참 좋은데...”
어쨌든, 글 써주고 안마 받기로 한 것은 잘된 일이다. 아내에게 치사한 부탁을 안해도 되고, 몸이 아플 때마다 그림 한 점씩 가져가서 안마 받으면 되겠어. 흠...서로 몸으로 때우는 일이니 뭐 손해 볼거 없고... 한글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을 써 줄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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