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과 검정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파랑과 검정

0 개 2,530 박지원

인식이 색깔을 바꾼다.

 

아주 어렸을 때, 내게는 스물네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던 크레파스가 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색깔을 닳도록 사용하고는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파란색이었다. 내 작은 기억들에 의존하자면, 나는 바다 혹은 강을 그렸던 적이 많았다. 바다는 보통 바다 속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 스케치북의 반 이상이 파란색으로 도배되곤 했다. 

 

그렇게 크레파스 끝이 맨들맨들 해지도록 하얀 스케치북 위를 칠하던 시절을 지나, 파란색은 어느 순간부터 공포를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되어갔다. 귀신이나 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TV 속에서 공포감을 표현할 때마다 파란 조명을 쓰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통 눈동자가 없고, 왼쪽 화면 구석에 진한 명조체로 “재연”이라 적혀있었던 많은 프로그램들 전부, 파란색을 조명으로 썼었다. 파란색은 무엇인가 섬뜩함, 싸한 느낌을 만들 수 있구나, 를 어린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 후의 파란색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어느 책에선가 파란색이 불가능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것을 듣고는 불가능이 주는 신비감에 관해 잠깐 생각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외국 락 음악에서 등장하는 “Blue”가 우울함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모든 색들이 그렇지만, 파란색은 내 인식의 저변이 가장 많이 이동했던 색일 것이다. 마치 파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고래처럼. 시간과 시간이 만나 시간이 지나는 시간들 틈틈에 어딘가의 빛처럼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느낌이, 나에게 있어 지금의 파란색이 된 것이다.

 

검정색은 조금 다른 경우다.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자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검정색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없었다. 큰 고래를 온통 새까맣게 칠하기도 했고, 당시 보던 NBA 의 광경을 그릴 때는 사람들을 전부 까맣게 그렸다. (실제로 어린 내 눈에 그들은 모두 그저 까맣게 보였을 것이다) 

열일곱 열여덟. 고딕펑크 패션에 빠졌던 이후로는 온통 시꺼멓게 입고 다녔다. 심지어 담배도 까만색 담배를 피웠을 정도로 허세 넘쳤던 그 때는, 검은색은 쿨함의 상징이었다. 검은색은 나를 드러내는 색이자 가장 드러내지 않는 색이었고, 마치 요란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같지만 그저 그림자일 뿐인, 그 때 내 심정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색이었다. 

 

그 후, 존경하는 영화감독 김기덕이 했던 이 말이 내 검은색의 세계관을 바꾼다.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모든 것은 서로 바라봄으로써 존재한다. 흰 색이라는 말이 없으면 검은 색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낮과 밤, 흑과 백, 플러스와 마이너스… 이 모든 것은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물론 흰색과 검은색 또한 그 색을 말할 것이 아닌 은유적 표현을 위한 도구이겠지만,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니. 김기덕 감독의 이 말은 내 세계관 중 하나의 줄기로 자리잡았고, 결국 인식 자체가 색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수능 때 공부했던 소설 <소나기>의 보라색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인식 자체가 색깔이며, 그 색깔은 스스로가 정의내릴 수 있고 보는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색깔이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색깔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수많은 환경들을 지나치며 마침내는 파란색이, 내게는 피상적이 아닌 본질적 심상의 컬러로서 자리한 것처럼. 모든 색깔들이 그렇게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는 검은색이(어쩌면 김기덕 감독이) 가르쳐준 것이다. 

 

쓸데없는 거 정의내리기 좋아하는 꼰대 철학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색깔”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을 조금 더 어린 시절에 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색깔에 대한 강박 혹은 편견 없이, 여러가지 색깔로 내 위를 덧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을 걸어나오면 -이 강박으로 인해- 이 길까지 걸어오며 낭비하고 버렸던 색깔들이 지금의 내게는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 흑과 백은 같은 색인 것을.  

 

벙어리 장갑

댓글 0 | 조회 1,672 | 2016.05.26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더보기

치과 (Ⅱ)

댓글 0 | 조회 2,158 | 2016.05.11
N의 동동거리던 발이 움직임을 멈춘 … 더보기

치과 (Ⅰ)

댓글 0 | 조회 3,666 | 2016.04.29
N과 함께 밥을 먹는데, N이 요즘 … 더보기

현재 파랑과 검정

댓글 0 | 조회 2,531 | 2016.03.24
인식이 색깔을 바꾼다.아주 어렸을 때… 더보기

댓글 0 | 조회 2,438 | 2016.02.25
무뎌진 발 뒤끝의 아릿함. 침대 위에… 더보기

안경

댓글 0 | 조회 2,054 | 2016.02.11
오빠가 사라졌다.안경이 너무 오래도록… 더보기

식물과 생각

댓글 0 | 조회 2,195 | 2016.01.28
8월부터, 웰링턴을 떠나 여기에 온 … 더보기

거미집(Ⅱ)

댓글 0 | 조회 1,952 | 2016.01.13
<<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더보기

거미집(Ⅰ)

댓글 0 | 조회 2,194 | 2015.12.22
약 혹은 총기류를 쓰지 않는, 일반적… 더보기

욕망

댓글 0 | 조회 2,220 | 2015.12.10
사실 욕망이란 잃었을 때, 비로서 서… 더보기

리더의 조건

댓글 0 | 조회 2,185 | 2015.11.26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드디어 꿈… 더보기

B 에게

댓글 0 | 조회 2,382 | 2015.11.12
안녕하세요. 동갑이지만, 매우 친한 … 더보기

댓글 0 | 조회 2,038 | 2015.10.29
일어났다. 나는 푸른 약과 붉은 약을… 더보기

댓글 0 | 조회 2,122 | 2015.10.15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 어처구니… 더보기

자존감 (A면-타인과의 비교 그리고 화)

댓글 0 | 조회 2,141 | 2015.09.24
화가 난다. 그것을 틱낫한은 이렇게 … 더보기

남겨진 것들

댓글 0 | 조회 1,957 | 2015.09.09
이사 뉴질랜드에 와서 네번째 이사를 … 더보기

江(Ⅸ)

댓글 0 | 조회 2,225 | 2015.08.13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잠이 든 … 더보기

江(Ⅷ)

댓글 0 | 조회 1,801 | 2015.07.29
일어났다. 4일 째. 아침. 강 위에… 더보기

江(Ⅶ)

댓글 0 | 조회 1,844 | 2015.07.15
짐을 모두 싣고 난 후 우리는 무릎까… 더보기

江(Ⅵ)

댓글 0 | 조회 1,819 | 2015.06.24
오후 네 시. 눈을 떴다. 천둥이 치… 더보기

江(Ⅴ)

댓글 0 | 조회 1,916 | 2015.06.09
다음 날 아침. 아직도 마르지 않은 … 더보기

작업기(Ⅵ)- 발매 그리고 사기

댓글 0 | 조회 2,334 | 2015.05.27
초심을 찾기까지 아무런 곡을 작업할 … 더보기

신해철

댓글 0 | 조회 1,936 | 2015.05.13
오랜만에 글을 쓴다. 뭔가 오랜만이라… 더보기

작업기(Ⅴ)-패

댓글 0 | 조회 1,906 | 2015.04.30
우선 너무 기쁜 나머지 바로 답 메일… 더보기

江(Ⅳ)

댓글 0 | 조회 1,998 | 2015.04.15
그렇게 세 번째 뒤집혔던 배를 타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