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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미지근한 걸 싫어합니다. 미지근하다는 건 시름시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 밥이 끓는 것도 아니고 안 끓는 것도 아니고 내내 앓는 소리만 내는 상태입니다. 왜 그런가?
열정이 없어서 그런가?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런 분도 어쩌다 눈이 맞으면 불 같은 사랑을 할 수도 있고, 언제든 자체 내에 가지고 있는 것이 불타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스스로 계발도 못 하고 누가 해주지도 않으니까 그냥 미지근하게 앓는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그걸 좀 찾아내십시오.
중용이란 늘어져 있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불 같은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를 어딘가에 발휘를 해야 됩니다. 자꾸 스스로를 부추겨서 자가 발전을 시켜야 됩니다. 자기 아궁이에 누가 불을 때주겠습니까? 왜 남이 때줄 때를 기다려요? 자기 스스로 불을 때서 가동을 시켜야 됩니다.
성인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가동시켜야죠. 왜 나는 가만히 있고 누가 자기를 불질러주기를 기다립니까? 그런 얌체가 어딨어요? 자기 아궁이는 자기가 지펴야 되는 겁니다.
내 스스로 역량을 강화시켜서 적어도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어야 되고, 주변까지도 내 힘으로 활력을 불러일으켜 줄 수 있어야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젊은 사람 중에도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늘어져 있는 분이 더 많습니다. 젊음이라는 특권이 뭔가요? 되든 안 되든 저질러볼 수 있는 것이 젊음 아닌가요? 내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젊은 사람이 왜 못 합니까? 허황된 꿈이 안 되도록 자기를 그렇게 계발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젊은 사람들이 꿈이 없는가?
명상하면서 다 비우라고 그런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왜 돈을 버느냐? 돈을 벌어야지요. 돈을 벌어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내가 하는 일에 돈을 쓸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자꾸 확대시키고 자기의 역량을 확대시켜야 됩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지구 전체는 머릿속에 둘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릇이란 무엇이냐?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수입니다. 처음엔 자기 몸 하나, 마음 하나 가누지 못해서 허덕이다가 점차 그릇이 커지면, 옆 사람이 밥은 먹었나 하는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우주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대개 뭘 못하는 거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겁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합니다. ‘난 못 해. 내가 그걸 어떻게 하냐?’ 그런 말들 많이 하죠. 그런데 ‘할 수 있다’ 그러면 합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면 그 말에 벌써 기운이 반으로 깎입니다. 그런데 ‘아, 해보지요’ 그러면 되든 안 되든 벌써 기운이 부추겨집니다.
남이 자기를 격려해주고 부추겨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를 부추기세요. 남이 기를 꺾는다고 꺾이면 안 되죠. 남이 왜 나를 좌우합니까? 남이 나를 부추긴다고 우쭐대는 것도 우습고요. 자기 스스로 생각해 봐서 자기를 믿고 격려할 수 있다면 그게 대단한 파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