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사랑, 피조아(Fej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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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나의 첫 사랑, 피조아(Fejoa)

0 개 3,295 피터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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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첫 사랑을 못 잊어 또다시 닮은 사랑을 하고 여자는 첫 사랑을 잊기 위해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한다고 했던가.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략 20년 전, 데본포트의 푸드 앤 와인 쇼에서 였다. 엄청난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던 그곳에서도 그를 발견해 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은 몇 년째 깍지 않고 길렀던지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Lothlorien Winery, 1241 Ahuroa-Puhoi Road, Warkworth, Aotearoa’ 이것이 재생지로 만든 그의 명함에 있는 내용 전부다. Warkworth는 1843년 처음 이곳에 도착한 영국인 존 앤더슨 브라운(John Anderson brown)이 자신의 고향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요한 마후랑이(Mahurangi)강이 마을을 굽이 굽이 끼고 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긴 수염을 날리고 선 그가 무심히 와인 한잔을 따라준다. 농장의 흙 냄새가 밴 그의 투박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조아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코끝에 태어나 한번도 맡아 본적 없는 아찔한 피조아의 향기가 와 닿는 순간 혼미하게 정신을 뺏겼다. 이어서 입술을 얹고 혀끝에 와인이 와서 닿을 수 있도록 잔을 기울였을 때 잠자던 모든 세포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첫 사랑의 혼미함이나 몽롱함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생애 처음 마신 과일 와인의 달콤함과 향긋함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스파클링 와인이 주는 신선한 청량감. 입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옴 몸으로 퍼져 나가는 간지러운 느낌들. 어쩌면 그에게서 풍기는 농부 냄새로부터 기대이상의 맛을 발견하고 느끼는 충격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와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경이로운 와인의 세계에 매료된 것 만은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날 이후 와인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와인의 신세계로 인도했던 Rogan을 주말에 찾아가기로 약속을 했다. 늘 털털거리던 농장 차로 배달을 다니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택배를 이용해서 와인을 보내주면서 그의 수염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치즈로 유명한 푸호이 빌리지를 지나서 한참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리자 그가 페인트 붓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듯한 농장 표지가 나타났다. 맨 처음 나를 반긴 것은 농장을 지키는 양몰이 개 Socks였다. 이어서 나타난 옛 친구 로간과 또 한 명의 산신령 모습을 한 그의 친구 Dale. 미국에서 학교교사였다는 Dale은 32년 전에 이곳에 왔단다. 이 둘은 산골짝에 들어와서 포도가 아닌 피조아로 와인을 만든다고 놀려대는 사람들에게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수염을 길렀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시엔 품격과 격조를 갖춘 와인은 포도주뿐이라는 편견이 그들을 미치광이로 취급 받게 한 이유였다. 그는 사과로 술을 만드는 영세한 사과농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얼마나 암담하며 어려운 시절이었을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길을 꿋꿋하게 갈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 사과나무를 하나씩 베어 버리고 그 자리에 피조아나무를 심는 그를 현실감이 없다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의 특별한 와인을 맛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욱이 피조아에는 폴리페놀 성분의 함유량이 높아 염증완화와 항산화 작용도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들과 함께 저온 발효시키는 탱크 옆의 와인셀러에 앉았다. 로간이 몇 병의 와인을 창고에서 꺼냈다. 살랑거리는 하얀 수염은 그날과 변함이 없다. 다만 그의 무뚝뚝함이 옛 친구를 맞는 부드러운 미소로 변해 있을 뿐. 와인의 향기가 밀폐된 셀러 안을 가득 채워갈 무렵 Dale은 뉴욕의 유명한 바의 벽에 걸려있다는 주당의 헌장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걱정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또 걱정은 두 가지일 것이다. 건강할 것인가 아니면 병이 들것인가. 만약 병이 들었다면 걱정은 두 가지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런데 당신이 죽는다면 또 걱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천당이냐 지옥 행이냐? 천당이라면 천만다행이지만 지옥에 떨어져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곳에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가득할 테니 말이다.’ 역시 낙천적인 주당들답다. 친구들과 좋은 술을 나누니 극락이든 천당이든 구분이 부질없는 일이란 것이다. 

Rogan과 Dale. 분명 영리한 장사꾼은 아니다. 그들은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분신처럼 와인을 빚는 도인처럼 보인다. 어스름하게 밤이 내릴 무렵 크게 자란 피조아 나무들과 함께 서있는 그들에게 나는 차창 문을 내리고 연신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흠뻑 정이 들어버린 양몰이 개 Socks가 달려 나오는 뒤편으로 그들의 와인이 수상한 금메달처럼 금빛노을이 가득하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시 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에 취한 나비의 꿈마냥 영원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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