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박종배
정동희
한일수
정윤성
크리스티나 리
송영림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강명화
새움터
수선재
휴람
마리리
김임수
조성현
박기태
성태용
피터 황
Jane Jo
조석증
배태현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병철
최형만
조기조
Neil PIMENTA
김수동
변상호경관
신지수
엔젤라 김
최성길
동진
이동온
김지향
이현숙
김영안
유영준
한 얼
박승욱경관
김영나
정석현
Shean Shim
빡 늘
CruisePro
봉원곤
써니 림
Mina Yang
김철환
박현득
Jessica Phuang
오즈커리어
여디디야

나의 첫 사랑, 피조아(Fejoa)

피터 황 0 2,486 2016.01.14 16:24
564.jpg


남자는 첫 사랑을 못 잊어 또다시 닮은 사랑을 하고 여자는 첫 사랑을 잊기 위해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한다고 했던가.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략 20년 전, 데본포트의 푸드 앤 와인 쇼에서 였다. 엄청난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던 그곳에서도 그를 발견해 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은 몇 년째 깍지 않고 길렀던지 산신령처럼 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Lothlorien Winery, 1241 Ahuroa-Puhoi Road, Warkworth, Aotearoa’ 이것이 재생지로 만든 그의 명함에 있는 내용 전부다. Warkworth는 1843년 처음 이곳에 도착한 영국인 존 앤더슨 브라운(John Anderson brown)이 자신의 고향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요한 마후랑이(Mahurangi)강이 마을을 굽이 굽이 끼고 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긴 수염을 날리고 선 그가 무심히 와인 한잔을 따라준다. 농장의 흙 냄새가 밴 그의 투박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조아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코끝에 태어나 한번도 맡아 본적 없는 아찔한 피조아의 향기가 와 닿는 순간 혼미하게 정신을 뺏겼다. 이어서 입술을 얹고 혀끝에 와인이 와서 닿을 수 있도록 잔을 기울였을 때 잠자던 모든 세포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첫 사랑의 혼미함이나 몽롱함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생애 처음 마신 과일 와인의 달콤함과 향긋함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스파클링 와인이 주는 신선한 청량감. 입안에서 톡톡 터지면서 옴 몸으로 퍼져 나가는 간지러운 느낌들. 어쩌면 그에게서 풍기는 농부 냄새로부터 기대이상의 맛을 발견하고 느끼는 충격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와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경이로운 와인의 세계에 매료된 것 만은 사실이다. 결국 나는 그날 이후 와인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와인의 신세계로 인도했던 Rogan을 주말에 찾아가기로 약속을 했다. 늘 털털거리던 농장 차로 배달을 다니던 그가 언제부터인지 택배를 이용해서 와인을 보내주면서 그의 수염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치즈로 유명한 푸호이 빌리지를 지나서 한참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리자 그가 페인트 붓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듯한 농장 표지가 나타났다. 맨 처음 나를 반긴 것은 농장을 지키는 양몰이 개 Socks였다. 이어서 나타난 옛 친구 로간과 또 한 명의 산신령 모습을 한 그의 친구 Dale. 미국에서 학교교사였다는 Dale은 32년 전에 이곳에 왔단다. 이 둘은 산골짝에 들어와서 포도가 아닌 피조아로 와인을 만든다고 놀려대는 사람들에게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경쟁적으로 수염을 길렀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시엔 품격과 격조를 갖춘 와인은 포도주뿐이라는 편견이 그들을 미치광이로 취급 받게 한 이유였다. 그는 사과로 술을 만드는 영세한 사과농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얼마나 암담하며 어려운 시절이었을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길을 꿋꿋하게 갈 수 있는 용기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 사과나무를 하나씩 베어 버리고 그 자리에 피조아나무를 심는 그를 현실감이 없다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이제 그의 특별한 와인을 맛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욱이 피조아에는 폴리페놀 성분의 함유량이 높아 염증완화와 항산화 작용도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들과 함께 저온 발효시키는 탱크 옆의 와인셀러에 앉았다. 로간이 몇 병의 와인을 창고에서 꺼냈다. 살랑거리는 하얀 수염은 그날과 변함이 없다. 다만 그의 무뚝뚝함이 옛 친구를 맞는 부드러운 미소로 변해 있을 뿐. 와인의 향기가 밀폐된 셀러 안을 가득 채워갈 무렵 Dale은 뉴욕의 유명한 바의 벽에 걸려있다는 주당의 헌장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걱정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성공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또 걱정은 두 가지일 것이다. 건강할 것인가 아니면 병이 들것인가. 만약 병이 들었다면 걱정은 두 가지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런데 당신이 죽는다면 또 걱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천당이냐 지옥 행이냐? 천당이라면 천만다행이지만 지옥에 떨어져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곳에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가득할 테니 말이다.’ 역시 낙천적인 주당들답다. 친구들과 좋은 술을 나누니 극락이든 천당이든 구분이 부질없는 일이란 것이다. 

Rogan과 Dale. 분명 영리한 장사꾼은 아니다. 그들은 깊은 산속에서 자신의 분신처럼 와인을 빚는 도인처럼 보인다. 어스름하게 밤이 내릴 무렵 크게 자란 피조아 나무들과 함께 서있는 그들에게 나는 차창 문을 내리고 연신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흠뻑 정이 들어버린 양몰이 개 Socks가 달려 나오는 뒤편으로 그들의 와인이 수상한 금메달처럼 금빛노을이 가득하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까닭은 다시 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꽃에 취한 나비의 꿈마냥 영원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

 플러스 광고

미드와이프 김유미 (Independent Midwife YOOMI KIM)
임신, 출산, 출산후 6주 신생아와 산모의 건강 관리를위해 함께 하는 미드와이프 김 유미 T. 021 0200 9575

쉬라즈(Shiraz)와 이순신 병법(兵法)

댓글 0 | 조회 194 | 2019.08.13
임진년(1592년)이후 7년간의 해전을 통해 보여준 전승무패의 역사는 한국인의 가슴에 신화가 되었다. 승리의 원리는 불리한 상황에서는 질(質)적인 전투력으로 일본수군을 압도하고 열… 더보기

전장(戰場)에서 목이 날아간 샴페인

댓글 0 | 조회 283 | 2019.07.10
1813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가 프랑스를 침략하고 샴페인을 생산하던 랭스(Reims)지역을 점령했을 때 포도밭을 맘대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남편 프랑수아 클리코를 여윈 어… 더보기

나의 혈액형은 카베르네

댓글 0 | 조회 444 | 2019.06.11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듯이 혈액형이 같은 사람은 같은 종류의 유전인자를 갖게 돼 성격, 행동, 질병이 비슷해진다고 한다. 피는 신선한 산소, 맑은 공기, 영양분을 인체에… 더보기

잡종의 생존법칙

댓글 0 | 조회 310 | 2019.05.14
와인의 품질은 포도 품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성에 크게 지배된다. 결국 품종이 같다면 재배지가 다르더라도 품질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더보기

상식을 깨는 돌연변이

댓글 0 | 조회 555 | 2019.04.10
피노(Pinot)라는 말은 솔방울을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그러니 프랑스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레드 와인인 피노누아(Pinot Noir)는 검은 솔방울이라는 뜻이 되는데 포도송이가 솔… 더보기

향기(香氣)를 잃으면 독(毒)이 된다

댓글 0 | 조회 389 | 2019.03.13
화학약품의 조합으로 실험실에서 와인이 만들어지고 콘크리트 빌딩에서 컴퓨터로 채소와 과일이 만들어진다. 덕분에 우리의 식탁은 향을 잃은 식재료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더구나 대량생산… 더보기

검은 순수 VS 황홀한 지옥

댓글 0 | 조회 535 | 2019.02.13
커피와 와인을 마시는 것은 곧 자연을 마시는 것이다. 처음에 이 둘은 약으로 사용됐다. 기원 전 에티오피아 부족들은 커피나무 잎을 씹거나 줄기 끓인 물을 마시며 에너지가 솟는 효과… 더보기

판타스틱 듀오, 커피와 와인

댓글 0 | 조회 555 | 2019.01.16
요즘 카페에서는 커피와 함께 와인이, 와인바에서는 와인과 함께 커피가 메뉴 판 리스트에 적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소믈리에나 바리스타들이 실제로 와인이나 커피 모두… 더보기

프로세코여~. 아직도 로맨스를 꿈꾸는가?

댓글 0 | 조회 502 | 2018.12.12
벼락처럼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는 로맨스를 우린 평생 몇 번이나 해볼 수 있을 까? 어떤 이들은 유치한 드라마 속 이야기 라고도 한다. 삶의 절정을 지나버린 나이가 되어도 몸과 마음… 더보기

빈치(Vinci) 마을의 천재, 레오나르도

댓글 0 | 조회 622 | 2018.11.15
프랑스 VS 이탈리아 (II)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화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발명가였다.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대포, 전… 더보기

욕쟁이할머니 맛의 비밀

댓글 0 | 조회 754 | 2018.10.10
신의 선물 와인의 초대 (67)​퇴근한 후에 산동네를 오르는 동네아저씨들은 길목에 있던 우리집 구멍가게를 그냥 지나 칠 수가 없었다. 한 동네 모두가 이웃이었고 주말이면 벌건 연탄… 더보기

파리(Paris)로 떠난 모나리자

댓글 0 | 조회 769 | 2018.09.11
프랑스 VS 이탈리아 (Ⅰ)카톡이나 안부를 먼저 보내주는 사람이 한가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늘 당신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툰 후에 먼저 사과하는 것은… 더보기

광화문에서 나는 숲을 보았다

댓글 0 | 조회 1,334 | 2016.12.06
세상 모든 것이 모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겠냐고 들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굶을 때면 제일 무서운 것이 그 목구멍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먹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더보기

호스트 테이스팅(Host Tasting)을 아시나요?

댓글 0 | 조회 2,116 | 2016.11.09
허물없이 친한 사람들끼리의 자리라면 그다지 매너를 따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형식이나 절차가 편안한 분위기를 너무 학문적(?)이고 딱딱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 더보기

와인의 몸무게, Body에 대하여

댓글 0 | 조회 1,445 | 2016.10.11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봄 햇살을 즐기며 풀숲에 평화롭게 누워있다. Fat Cat, 이 그림이 그려진 와인을 마신 후에 느껴지는 느낌이 상상이 되는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그랬… 더보기

속도중독, 느리게 살 수 있는 용기

댓글 0 | 조회 1,571 | 2016.09.15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너무 빨리 달리고 있다. 느리게 따라가다 보면 상위무리에서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이 모두를 괴롭힌다. 근면한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이 지금의 선진한국을 만들었… 더보기

와인 디자인, 블렌딩(Blending)의 세계

댓글 0 | 조회 3,000 | 2016.08.11
언제나 손님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맛 집들은 대부분 한 가지 메뉴로 승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창적인 비법으로 대를 이어가면서 전통의 맛을 변함없이 지켜가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더보기

초콜릿을 사랑한 아이스(Ice)와인

댓글 0 | 조회 1,637 | 2016.07.14
사랑을 하게 되면 서로 닮아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초콜릿과 와인은 닮은 점이 많다. 초콜릿의 재료인 카카오 빈이 전혀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맛과 성질을 가지고 있듯이 … 더보기

나폴레옹과 술의 황제, 코냑(Cognac)

댓글 0 | 조회 4,936 | 2016.06.09
프랑스의 지명이기도 한 코냑(Cognac)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최고급 브랜디(Brandy)인 코냑이 와인을 증류해서 만든 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 더보기

엄친아 아버지, 카베르네 프랑

댓글 0 | 조회 2,234 | 2016.05.11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공부 잘하고 부모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한다는 무시무시한 존재, 엄친아(엄마친구아들). 이제는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일반 명사로 쓰인… 더보기

청주(淸酒) VS 사케(Sake)

댓글 0 | 조회 3,442 | 2016.04.13
아버지와 여러 겹의 노끈으로 손잡이를 만든 백화수복을 들고 고향에 내려 올려다본 밤하늘엔 별들이 빼곡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 더보기

청국장과 치즈는 누가 다 먹었을까

댓글 0 | 조회 2,833 | 2016.03.10
카메라 앞에만 서면 무뚝뚝하게 서있는 나에게 사진사는 간절하게 김치를 외쳐댄다. 그래 봐야 마지못해 억지웃음을 만들어내자 이번엔 치즈를 부르짖는다. 입가에 웃음을 만들어내는 소리,… 더보기

육각형의 방, 코르크(Cork)의 정체

댓글 0 | 조회 2,426 | 2016.02.11
와인은 오래될 수록 좋다는 생각이 보편적이다. 숙성이 되면서 풍미가 풍부해지는 와인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와인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코르크(Cork)는 와인이 개봉… 더보기
Now

현재 나의 첫 사랑, 피조아(Fejoa)

댓글 0 | 조회 2,487 | 2016.01.14
남자는 첫 사랑을 못 잊어 또다시 닮은 사랑을 하고 여자는 첫 사랑을 잊기 위해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한다고 했던가.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략 20년 전, 데본포트의 푸드 앤 와인… 더보기

요강을 뒤엎는 술, 복분자(Black Raspberry)

댓글 0 | 조회 2,449 | 2015.12.09
대충 약 30년 전의 서울시 시민들의 이야기가 리얼하다. ‘연탄불, 성문종합영어, 골목길, 카스텔라’. 응답 받고 싶은 1988년도, 나의 대학시절이기도 한 그 시절 시대적 아픔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