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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Vintage), 타이밍의 미학

피터 황 0 1,603 2015.02.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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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년대 거대한 문화복고의 열풍이 한국을 휩쓸었다. 쇼 프로그램에서 시작된 옛 가수들의 콘서트가 불씨가 되어 영화, 음식까지 청년세대뿐 아니고 장년층까지 어려웠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고 장소를 끊임없이 찾게 했다. 이러한 복고의 열풍을 두고 힘들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어려운 현실을 위안해 보려는 심리라고들 한다. 하지만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을 통해서 이만큼 와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과거를 돌이켜 현재의 자리를 확인해 보는 것은 다시 힘을 내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도움이 된다. F. 실러는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간다.’고 했다. 결국 영원을 꿈꾸는 것은 미성숙한 이들의 허무한 바램이다. 모든 것은 소멸한다. 

와인을 오래 보관할 수록 숙성이 되어 맛이 좋아진다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모든 음식이 그렇듯이 최적의 숙성시기가 있다. 그때가 와인을 즐길 타이밍이다. 와인이 생산된 연도를 빈티지(Vintage)라고 한다. 같은 포도원에서 생산한 동일한 와인일지라도 생산한 년도에 따라 맛과 가치는 달라진다. 그래서 와인을 선택할 때는 산지와 품종 외에 빈티지도 고려해서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와인은 다른 술과 달리 물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는 과일만으로 만든 양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생산된 와인마다 보관이 가능한 기간(Cellar Potential)이 있다. 와인을 숙성시켜 먹는 것은 초기의 떫고 시었던 맛이 부드럽고 원만해지며 와인에 복합적인 맛과 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와인이 숙성에 의해 맛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와인의 생명주기에 따라 마실 시기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실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면 맛은 점차 시들어진다. 

와인의 품질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지는데, 무엇보다도 포도의 숙성과 발육을 결정짓는 날씨에 따라 스타일이 결정된다. 그러다 보니 심술궂은 자연의 시샘으로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보면 큰일이다. 포도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에 불어 닥치는 혹한이나 서리, 한창 포도 알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시기에 찾아온 병충해, 수확기의 지나친 강수량 등은 포도의 품질에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된다. 적절한 타이밍과 알맞은 강우량, 충분한 일조량 하에서 생산된 와인의 품질은 당분, 산, 타닌이 조화를 이루고 아로마와 부케가 풍부하다. 그러므로 우수한 와인 생산에 있어서 적합한 날씨는 절대 조건이다. 어느 해에 생산했느냐에 따라 와인의 맛은 물론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되는 것이다. 

빈티지는 포도 수확 당시 포도 품질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의 품질이나 성격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항상 빈티지 차트를 참고하여 와인을 구입한다. 빈티지 차트는 전세계와인의 품질과 숙성도 안내서(A General guide to the quality and drinkability of the world’s wines)라고 할 수 있다. 

빈티지 차트에는 와인을 마시기에 적절한 시기를 나타내는 숙성도가 컬러로 표시되는데 그것은 품종, 제조방법, 생산지역에 따른 와인의 전성기를 알려준다. 예를 들면 보르도에서 생산된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장기숙성와인(김장김치와 같은)이 있는가 하면 보졸레에서 생산된 보졸레 누보(겉절이김치와 같은)와 같이 와인의 숙성기간이 짧은 와인이 있다. 이렇듯이 오랜 침용과정을 거치고 오크통에서 충분한 숙성을 필요로 하는 복합 미를 추구하는 와인과 짧은 숙성기간을 보낸 상큼하고 풋풋한 햇 와인은 양조방법은 물론이고 보관기간까지 다르다. 그러므로 와인은 무조건 오랫동안 묵혀서 마시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와인에 따라 최적의 숙성시기에 마셔야만 그 품종과 지역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다. 즉 오래 두고 묵혀서 병 숙성을 해야만 잠재적인 맛이 우러나오는 와인이 있는 반면 오래 두고 마시면 식초가 되어 버리고 마는 와인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와인을 생산한다는 것을 하나의 예술로 여겨왔고 주어진 환경과 자연에 순응하고 의존하여 와인을 생산했기 때문에 빈티지는 아주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생산방법과 테루아(Terroir, 토양, 기후 등 자연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유럽의 구 대륙 와인은 빈티지에 따라 와인의 맛이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신대륙 와인(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호주, 뉴질랜드)은 발달된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지속적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고 날씨의 변화가 유럽대륙처럼 심하지 않아서 빈티지를 중시하지 않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예쁜 꽃도 열흘 동안 붉은 법은 없는 법이다. 그렇게 좋던 시절은 한 순간에 훅 간다. 결국 괴테의 말처럼 ‘평범하지만 오직 오늘 만이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미 이순간 늙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늘 이 순간 온 힘을 다해 화려함을 뽐내는 분홍 꽃은 지기 때문에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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