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아 기르면서 늘 삶을 함께 했다고 믿기에 부모들은 세상에서 자녀들에 대해 잘 안다고 혹은 이해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필자 또한 늘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한다고 믿으면서, 내 자녀에 대해 ‘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그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 부모들은 알아야 한다. 왜냐면 부모 앞에서 보여지는 자녀들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처럼 작은 부분에 지나치지 않는 경우들이 많고 그래서 부모들이 모르는 자녀들의 고통과 괴로움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그들을 힘겹게 만들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픽업하면서 늘, 오늘 잘 지냈니?라고 묻는 엄마의 질문에 항상 ‘네’라고 대답하는 딸의 말이 진실이 아님을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친구하고의 문제로 마음으로 힘든 적이 있었음을 알고는 왜 그 당시에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딸은 엄마가 늘 내가 완벽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 같고 또 바로는 말하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엄마도 바빠 보이고 스트레스를 스스로 알아서 풀어가는 것 같아 보여서, 자기 스스로도 그래야 되는 구나 여겼더라고 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며칠은 내내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면서 마음이 아팠고 딸을 잘 안다고 여겼던 나의 오만함에 대해 반성했다. 그러면서 필자가 만난 많은 상처받은 아이들이 떠오르면서,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 보다 성숙하고 마음이 깊어서 아픔을 나누기 보다는 어려움을 호소하기 보다는 자기 안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필자가 만난 아이들 가운데 외적으로 보았을 때 완벽해 보이지만 부담감과 불안감을 안고 힘겨워 하던 몇 몇의 아이들도 떠올려 졌다. 부모의 칭찬과 기대를 위해 살아가면서 성적도 우수하고 친구관계나 학교에서의 인정, 소속된 공동체에서 리더 역할도 하면서 누구든지 부러워할만한 조건을 다 갖추었지만,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아픔은 아무도 모르고 또 드러내서도 안될 것 같은 중압감에 무거운 추를 품고 살아간다.
좋은 대학을 가고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힘겨웠던 마음이 보상되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 성숙해야 하는 어른이 되면서 그들은 한 번도 짐을 내려놓을 기회를 가져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행처럼 떠도는 공황장애, 우울증, 강박증이 생기고 홀로 있는 시간에 겉으로는 볼 수 없는 아픔이 곪아져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고민 끝에 겨우 할 수 있었던 방법은, 학교 끝나고 나오면서 잘 지냈냐는 물음에 ‘나쁘진 않았어요’라고 대답하는 경우는, 뭔가 마음에 맞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는 뜻으로 알고 대신 말을 하고 싶지 않아할 때는 맛난 걸 먹으러 간다든지, 가벼운 쇼핑을 한다던지, 산책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시켜주기로 한 것이다. 며칠을 고민하면서 부모로써 자녀들의 고민이나 상처를 대신 앓아줄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대신 옆에서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겨우 그 정도였다. 대신 너무 힘들면 말하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자라고 십대가 되고 성인이 되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을 때 필자는 참으로 초라해졌다. 아…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 왜냐면 그들의 몫이고 부모들도 그 과정을 겪으며 성장할 수 있었기에 겪도록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플 수 있고 말 못할 일들로 고민이 있어서 부모에게 소홀하거나 냉랭하다 여겨질 때 서운해하거나 오해하는 부모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주는 부모가 되는 것이 그들을 위한 부모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아는 내 아이는 저런 아이가 아닌데 왜 저럴까 싶을 때,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다고 여기며 안아주고 잘해주자! 그것이 부모된 의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