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잔디. 그린. 자연. 그리고 동물.
햇빛에 반사되 더욱더 빛을 내는 골든리트리버와 건장한 키위 청년이 비치가를 조깅하는 모습.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손을 잡고 다정히 산책하며 옆으로 살금살금 바쁘게 쫓아오는 잭 러쉘.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럴 때에 난 묻는다.
넌 어디에서 왔니?
동물이 가장 많은 곳을 생각해 보니 동물원이 생각이 난다. 어엿한 고등학생이였지만 아이처럼 신나서 갔던 오클랜드 동물원. 즐거운 시간을 지내고 몇 년 후에 그 날을 회상하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 때엔 그저 저 멀리 우리안에 있는 그들이 재미있고 신기할 뿐이였다. 단지 그것뿐. 동물들을 가족처럼 몇년이란 긴 세월을 같이 웃고 울고 지내다보니, 다른 곳에 있는, 우리 안에 갇혀져 있는 그들이 처음으로, 가엾다는 생각이 강하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누가 이런말을 했었다. 동물원이란건 다 없어지고 이 세상을 다 동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 사람의 뜻을 난 헤아리지 못했다. 난 시간이 필요했다.
동물원을 생각하니 예전 노스쇼어에 종종 개시하는 서커스가 생각이 났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그 천막 아래에서 몇십명 몇 백명의 재미, 웃음을 위해서 그들이 겪었을 고된 훈련과 아픔이 제일 먼저 날 괴롭혔다. 돌고래 쇼, 거리 공연, 집이 없어 떠도는 동물들. 수없이 많다, 그들의 고향, 시작은 어디였는지, 언제였는지.
그들의 근원지는 참 찾기가 어렵다, 때론 초라한 길거리 골목 뒤에 이유없이 버려지는 아이들, breed를 지키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수 많은 아이들. 이곳 저곳을 떠돌며 안타깝게 운명을 하는 그들. 도착지가 없는 근원지가 없는 동물들은 가여운 존재다. 불쌍하다.
이런 질문을 한다. 그들은 권리란게 있는것일까? 우리처럼, 배가 고플때엔 먹고, 잠을 자고 싶을땐 잠을 청하고,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고, 공평함 정의를 존중받고,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수없이 많다. 난 솔직히 이렇게 생각한다. 동물의 권리는 사람마다 생각하기 나름. 몇만 명의 의견이 일치 될 수는 없는법. 하나의 동물이 조금이나마의 자유를 다시 돌려받게 되고, 이로인해 그 동물들이 행복이라는 삶의 중요한 요소를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자유로운 자유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쉽다고 생각하면 정말 쉬운 일. 맛있는 음식을 주는것, 산책을 갔다 온 후 발과 배를 깨끗이 씻어주는 일, 잠을 잘 수 있게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 이게 다 자유가 아닌가.
때론 몇몇은 동물의 권리란 질문을 들으면 웃을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요즘은 재벌이나 부자들은 자신의 강아지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곤한다.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는게 아닌가. 무언가를 눈으로 직접 보았을때, 조그마한 정말 사소한 질문을 할 때에,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또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면 그 상황에 그들이 그 곳에 있는 이유, 그들의 행복, 그들의 자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라는게 생기기도 한다. 난 백명, 만명의 생각을 바꾸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글, 바로 그들의 목소리, 이 지나가는 한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을 그들, 갈 곳이 없어 어둠 아래에 삶을 사는 그들, 그것이 모두 어떻게 보면 우리,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안겨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사람은 도리가 있고 의리가 있다. 도덕에서 배운 우리의 도리, 공평함을 존중하는 우리의 의리, 오늘은 그 들에게 한번 나눠주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