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다지 여성스러운 편이 아니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학교에 츄리닝을 입고 가거나 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화장도 물론 하지 않는다. 얼굴에 무언가를 바르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혐오감에 가까울 정도로. 로션이건 스킨이건 선크림이건, 얼굴에 낯선 액체가 닿아 끈적이면서 냄새를 남기는 것, 바르고 나면 손에서도 그 냄새가 떠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 그런 것들은 잘 마르거나 스미지도 않아서, 무언가를 들고 있거나 하면 그 물건에 하얗게 묻어 나온다. 질척하다. 정말 싫어한다.
물론 어디서건 아름답게 (때로는 괴기스럽게) 화장한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동경심과 더불어 존경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 또는 싫어하는 것을 - 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아마 거의 매일.
내가 내 몸에서 유일(아니, 유이 唯二)하게 신경 쓰는 부분은 두 곳이다. 입술과 손톱. 둘 다 찢어지면 매우 불편하고 아픈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점에선 그야말로 순수하게 실용주의적인 게 나란 사람이다.
손톱. 나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손톱은 심미주의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우선 손과 손톱의 모양은 사람의 인상을 어느 정도 좌우한다. 둥글고 짧은 손톱은 귀엽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 길고 뾰족한 손톱은 꼼꼼하고 외향적인 성격, 하는 식으로. 손톱의 상태와 손질된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타입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재미있다. 물론 종종 손톱과 그 사람의 성격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손톱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특히 잘 손질되어 매니큐어까지 완벽하게 끝마쳤다면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도 극도의 아름다움을 발한다. 모나거나 울퉁불퉁한 부분, 흠집 하나 없이 샌딩되고 큐티클도 없이, 모양을 잡아 깔끔하게 길러 (혹은 잘라) 버핑까지 끝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손톱. 길이가 손가락 바로 끝에서 끝나있던, 여성스럽게 길게 자란 것이던 모두 좋다. 전자는 청아한 비즈니스 우먼, 후자는 고풍스럽고 고독한 상류층 여인을 연상시킨다.
네일 아트도 나의 소소한 낙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손떨림이 심한지라 그다지 멋진 아트를 만들어내진 못하지만, 모 숙련된 아마추어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절로 황홀해진다. 작품. 그래, 아름답게 관리해 장식한 손톱은 그야말로 하나의 캔버스라 할 만 하다. 명화를 보는 것처럼 심미주의적인 만족감에 가득 차게 된다. 그런 것들을 보고 나면 나도 따라서 해보는데, 대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아 아주 짜증이 난다. 주변도 지저분해지고.
물론 손톱을 기르면 불편한 점이 많다. 우선 어디에 걸려서 찢어지거나 부러지지 않게 수시로 신경을 써야 하고 (나처럼 손톱이 약하고 불건강한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타자를 치거나 피아노를 칠 때면 종종 건반이나 자판 사이에 끼어버린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어서 손톱이 상하기라도 할 경우엔 마음도 같이 상한다. 아깝게시리, 기껏 길렀는데, 하는 감도 있지만, 다른 아홉 개의 손톱들은 모두 모양을 잡아 길쭉한데도 이것 하나만 부러져서 짧게 갈아야 한다는, 균형의 깨어짐으로 인한‘완벽함’의 손상에 나는 기분이 상하는 것이리라. 이럴 때, 완벽함은 아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으레 ‘완벽해지기 위해’ 다른 손톱들도 똑같이, 모조리 짧게 잘라버린다. 비록 아깝긴 해도 괜찮아, 손톱이란 건 어차피 다시 자라는 거잖아, 하고 자기 위로를 하면서.
부러졌을 때의 그 허탈함도, 예쁘장한 모양을 내기 위한 고군분투도, 멋들어지게 색을 입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모두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손톱이란 건 그렇다. 결국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