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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에 대한 추억

조병철 0 2,010 2013.04.10 13:31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밝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이마/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 영로 시인의 ‘논개’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어찌 강물결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르게 보았을까?

1960년대 한국의 여름 장마는 길고 지루했다. 비가 억척같이 내렸고, 이 때가 되면  어김없이 강낭콩이 익었다. 그래서 걷어들인 강낭콩을 말리는 것이 문제였다. 무더운 여름철 임에도 강낭콩을 말리기 위해서 방에 불을 지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한 강낭콩은 장마비로 그대로 나무에 달린 채로 썩거나 싹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강낭콩은 다른 콩보다 재배 기간이 짧아서 엇그제 심은 것 같은 데 벌써 열매가 탐스럽게 익었다. 그리고 다른 콩과는 달리 콩알이 커서 풋콩을 까기가 쉬웠다. 게다가 색깔도 알룩달록 다양해서 보기에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밥에 넣을 강낭콩을 까는 것은 모두 어린 애들의 몫이었다.

식량이 충분치 못했던 시절 쌀을 아끼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강낭콩은 여름철 배밑콩으로 제격이었다. 또한 강낭콩이 들어간 누룽지는 식사 후에 정말로 고소한 보너스 였다. 게다가 간식 걸이가 마땅치 못했던 그 즈음 통밀가루와 섞어 만든 강낭콩 개떡은 배를 든든하게 해준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렇게 강낭콩은 그 시절 식량의 한 부분으로 커다란 역할을 했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린 객지생활 때, 귀향 후 부모님의 선물 보따리에는 어김없이 강낭콩이 들어 있다. 어디서 구해서 심은 건지 분명치 않으나, 굵직한 ‘덩굴강낭콩’이었다. 이제 짜리몽땅한 작은 키의 강낭콩에서 울타리 타고 넘는 ‘덩굴강낭콩’으로 바뀐 것이다. “밥에 섞으면 구수해서 먹을만 하더라” 하시는 시어머님 말씀에 며느리는 강낭콩 밥을 짓는다. 도시 출신 새며느리는 서방님 밥에는 강낭콩을 여러개 자신의 밥그릇에는 한알만 담는다. 입맛이 까다로운 며느리는 구수한 강낭콩의 맛을 들이기도 전에 그저그런 콩으로 취급한다. 강낭콩 보다 더 맛있고 불리지 않아도 콩과 함께 밥을 지을 수 있는 서리태콩한테 밀려 났기 때문이다. 

오클랜드에서 다시 ‘덩굴강낭콩’을 만났다. 유기농 전문점에서 씨앗 한 봉지를 사다 담장 밑에 심었다. 싹이 트는 것을 보며 신이났다. 아뿔사, 이게 왠 일이가; 봄철 배고픈 달팽이와 슬러지가 자신들을 위해 심어줘 고맙다고 마구 먹어 댄다. 종자도 건지지 못했다. 다음해 단단히 벼르고 다시 도전한다. 이제는 아주 포트에 심어서 훨씬 자란후에 옮겨 심는다. 그래도 반은 배고픈 손님한테 헌납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종자를 하고 남아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여름철에 정성들여 물을 준 덕분이다. 햇강낭콩 밥은 강낭콩 맛을 제대로 들이지 못했던 아주머니 한테도 “물값은 많이 들었어도 맛이 있네”다. 아마도 입맛이 변해서 그렇겠지만.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리 맛 있다는 강낭콩 밥도 애들한테는 별로다. 밥에서 강낭콩을 모두 골라낸다. 물론 그거야 강낭콩 세대인 아버지의 몫이지만.

이제 강낭콩 재배 전도사를 자처한다. ‘덩굴강낭콩’을 키우는 데는 종자만 몇 개 있으면 되고; 봄철 뒤뜰에서 밤낮을 지키는 배고픈 손님들만 잘 달래면 새순을 지킬 수 있다. 오클랜드에서는 여름 가뭄이 심하다. 그래서 여름철에도 땅에 수분이 많은 장소가 적합한데, 어디 그런 곳이 많겠는가.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은 주어야 한다. 수돗물이 아까우면 빗물을 받아서 주시라.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모았다 이용하는 게 최선이다. 한번 심기만 하면 종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신기하게도 이 덩굴강낭콩은 가을에 낙엽지고 줄기가 모두 말라도 뿌리는 그대로 살아 있어, 다음해 봄에 다시 새싹이 나온다. 몇 년간 계속될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덩굴강낭콩’은 자꾸만 새순을 돋아 내는 데, 새로 강낭콩 맛을 들이려는 이 없으니.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강낭콩 세대는 그저 추억에 잠기는 수 밖에. 어디 강낭콩 맛 함께 할 이 없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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