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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도로 숨다

오클랜드 문학회 0 382 2018.03.30 10:26

                                                          장정일

 

공습같이 하늘의 피 같은 소낙비가 쏟아진다

 

그러자 민방위 훈련하듯 우산 없는 행인들이

 

마구잡이로 뛰어 달리며 비 그칠 자리를 찾는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물색할 여유도 없이

 

가까운 지하도로 내려가 몇 분쯤 비를 피하기로 했다

 

계단에서부터 달싹한 무드 음악이 내리깔리는 지하도

 

비 한 방울 스며들지 않는 지하도가 믿음직스럽다

 

언젠가 그날이 와서 몇십만 메가톤의 중성자탄을 터트린다 해도

 

사십 일간의 홍수가 다시 진다 해도 끄덕하지 않을 지하도

 

나는 느릿하게 지하도의 끝과 끝을 거닌다

 

검둥개라도 한 마리 끌고 다녔으면 그 참 멋진 산보일 것인데

 

슬금슬금 윈도를 훔쳐보는 나에게 어린 점원들이

 

들어와 구경하시라고도 하고 어떤 걸 찾으세요 묻기도 한다

 

각종 의류며 생활용품 그리고 식당에서 화장실까지 거의 완벽한 지하도

 

그러면 이런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곳에서 여자 만나

 

연애하고 아이 낳고 평생 여기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바깥에서 비가 그쳤는지 어떠한지 도무지 여기서는 알 수가 없다

 

도무지 바깥의 기상을 알 수 없는 여기는 무덤인가

 

장신구며 말이며 몸종과 비단 옷감이며 씨앗 단지들

 

그 많은 부장품을 함께 매장한 여기는 고대인의 무덤인가

 

지하도의 끝에서 끝으로 한 번 더 걸으며 윈도에 비친 얼굴을

 

쳐다본다. 창백해진 얼굴, 아아 내가 이 무덤의 주인인가?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아무 점원도 나를 불러 세우거나 묻지 않는다

 

그래 나는 유령 이제는 비가 그쳤기도 하련만 지상으로 올라가기가 싫다

 

이렇게 할 일 없이 걷다가 방금 내려온 친한 친구라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면서 모르는 지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아니 감쪽같이 숨어 있고 싶다 사흘을 여기 숨었다가

 

게단을 밟고 집으로 돌아가 보는 재미도 괜찮으리라

 

전화도 전보도 없이 사흘간을 아무 연락 없이 잠적해버리면

 

어머니는 얼머나 슬퍼하시련가 두 번이나 나를 체포하고 고문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파출소 같은 데다 실종신고를 내시지는 않을까

 

하지만 나는 유유히 돌아가리라 그리고 나는 부활했다

 

휘황찬란한 백 촉 전구가 불 밝히고 늘어선 문명의 무덤을 걷어차고

 

나는 솟아올랐다. 들어라 나는 재림 예수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은 믿을 것이다 안 믿을 것이다 아마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아 믿거나 말거나

 

비를 피해 나는 지하도로 숨은 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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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장정일 

 

■ 오클랜드문학회 오클랜드문학회는 시, 소설, 수필 등 순수문학을 사랑하는 동호인 모임으로 회원간의 글쓰기 나눔과 격려를 통해 문학적 역량을 높이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021 1880 850 aucklandliterary201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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