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3,337
23/03/2010. 14:38 NZ코리아포스트 (219.♡.21.112)
왕하지의 볼멘소리
저녁에 돌담길을 걷다보면 윙윙거리며 트렉터를 타고 일하는 로저와 만나게 된다.
“하이~ 로저,” 내가 인사를 하면 로저는 일을 하다 말고 달려와 말을 건다.
아, 그냥 일이나 계속하지 뭔 할 얘기가 있다고 달려오는 거야, 로저는 내가 영어를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그런 건 관심이 없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인다. 지난번에는 자기 집 복숭아를 땄다고 입고 있는 티셔츠를 벌렁 뒤집어 복숭아를 담아 우리 집에 왔었다. 배꼽이 보이면서까지 얼마나 많이 담았는지 한 바구니는 됐다.
털털한 외모에 그야말로 순박한 시골 목동이다. 로저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땅을 갖고 있는데 그 땅의 돌담길을 걷는데 만도 1시간은 족히 걸린다. 소 젖 짜랴 울타리 고치랴 잡초 뽑으랴 혼자서 일을 하니 로저는 항상 바쁘다. 우리 집의 쓰러진 나무를 잘라주기로 했는데 언제 잘라줄지 모르겠다. 그는 5남매를 두었는데 출가했거나 자립해 모두 타 곳에서 살고 있다. 5남매가 크는 동안 땅 한 평 줄어들지 않았으니 늙어서 고생이 말이 아니다.
한국 같으면 자식들이 늙은 부모 농사짓느라 고생 한다고 땅을 쪼개 팔아 갔을 텐데,
“아버지, 땅을 줄이니까 이제 좀 편 하시지요. 좀 더 줄여 드릴까요?”
“퍽도 편하다 이놈아~ 너 땅 팔아 간 거 벌써 말아 먹었냐?”
늙어 주름진 아버지는 남의 논둑에 앉아 담배만 뻐끔 뻐끔 피워 댄다.
오래간만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잠에서 덜 깨인 채 눈을 비비며 나가 보니 배리와 앤디 부부가 와 있었다. 배리부부는 해밀턴에 사는데 조카의 결혼식이 있어 왕가레이에 왔다고 했다. 배리는 그 동안 우리 집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 보았는데 내가 더듬거리며 헤매자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한다.
“너 정말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는데 문제없냐? 이렇게 영어를 못하니... 쯧쯔,”
배리는 한숨을 내쉬며 일정이 바쁘다고 서둘러 가 버렸다. 문제? 그러고 보니 문제가 많긴하다. 내 입에서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배리부부는 2년 전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살았었다. 배리는 4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타 곳에 살고 있고 큰아들만 왕가레이 시내에 살아 주말이면 아들부부와 손자들이 놀러오곤 하였다. 그런데 중앙공무원인 큰아들이 해밀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배리부부도 집을 파는 대로 해밀턴 아들집 근처로 이사를 가야되는데 영어를 못하는 내가 마음에 걸리는 듯 걱정을 하였다.
앤디는 선생님을 하다가 은퇴를 했고 아내의 홈튜터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배리도 일정한 교육을 받고 홈튜터가 되어 나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원래 공부만 하려면 머리가 아프고 혈압이 올라가는 이상한 증상이 있어 웬만하면 공부를 안 하는데 배리와의 공부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다. 배리는 내가 이 곳에서 살아가면서 꼭 해야 될 일에 대해 물어 보았고 그것을 주제로 공부를 시켰는데 사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배리는 수업준비는 잘 했지만 앤디의 가방과 바꾸어 가져오거나 준비물을 잊어버리고 올 때가 많아 늘 나에게 물어 보았다. “지난번 공부한 게 뭐지? 오늘은 무엇을 공부하기로 했지?” 난들 그것을 기억하겠는가, 나는 배우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았다.
그래도 머리 안 아프고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는 진보적인 사실만으로도 흡족할 무렵 배리가 부동산에 집을 내 놓았다.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안 팔릴 거라고 기대했는데 집이 팔렸고 배리는 이사를 가 버렸다.
배리는 이사 가기 전 영어도 잘 가르쳐 주는 좋은 친구를 하나 만들어 주고 간다고 했는데 못 만들었는지 그냥 가면서 우리도 해밀턴으로 이사 오라고 했다. 배리는 내가 이 곳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것저것을 알려 주고 도와주는 참 좋은 친구였다. 항상 고마운 생각에 배리부부의 그림을 그려 준다 했는데 이제서 그렸다. 그림을 보내 주면 배리와 앤디가 기뻐하겠지...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