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 침묵을 채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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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 침묵을 채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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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원래 자주 켜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는 대개 불쾌하게만 느껴졌고, 그런 목소리들이 아무래도 좋을 문제로 떠들어대는 걸 가만히 참으며 듣고 있을 성질은 못되기 때문이다. 보통 라디오, 혹은 오디오 기기는 내게 있어서 음악 CD를 틀어놓을 매개체 정도밖에 되지 못했고 그건 아주 최근까지도 변치 않았다.

 

음율에 맞춰서 미리 정해진 가사를 부르는 게 대화보다 듣기 편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은, 특히 낯선 이들 간의 것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됨과 동시에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 까닭 모를 적의 비슷한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내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소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이고, 허락 없이 주변 공기를 침범하는 바깥의 소음은 말 그대로 침입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타인의 존재와 요소를 배제한다.

 

한국에 살 때는, 자동차에 USB를 꽂아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 당시 내 기준으론 - 매우 충격적이기 짝이 없는 첨단기술(?)이 있어서 아주 행복했다. 출퇴근 내내 남의 목소리보단 좋아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혹 USB를 잊어버릴 때가 있었고, 그럴 땐 가끔 기분 전환으로 라디오를 틀어보기도 했지만 이내 견디지 못하고 꺼버렸다. 출퇴근 시간의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광고들은 무척이나 방정 맞고 경박했다. 차라리 나레이터의 목소리 없이 음악만 24시간 내내 틀어주는 채널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주파수가 있다면 찾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모든 성우들의 목소리가 싫었던 건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깊게 남은 건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퇴근 시간이면 제일 쉽게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빠가 좋아하는 방송이었다. 여자 DJ라면 보통 높은 소프라노일 거라던 내 편견을 깨부숴준 프로그램으로, 나레이터의 음성은 원숙하면서도 낮고,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다. ‘듣기 쉬운 목소리’ 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듣기 좋을 뿐만이 아니라 어쩐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목소리. 고르는 음악들도 대체로 옛날의 흘러간 팝송들이어서 거부감 없이 청취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 돌아오고 나서는 다시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는 생활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내가 일하는 직장에선 영업 시간 내내 라디오를 틀어놓기 때문에 반강제로 그 소음들을 견뎌내야만 한다. ZM의 시끄러운 방송, 세 명의 남녀 DJ가 웃고 떠들고 가끔은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꽁트를 주고 받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물론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는 아니다. 꽤 견디기 힘들 정도로 항상 에너제틱하고 감정의 모든 세세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따금씩 한 마디를 던지고선 박장대소를 하는데, 머리 위의 스피커들이 우렁우렁 울릴 정도로 시끄럽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이 방영할 때가 되면 항상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DJ들이 떠들지 않을 때면 광고와 음악이 주류를 이룬다. 보통 최신 유행곡들이나 빌보드 차트 순위에 오른 음악들이지만, 요즘 들어 10여년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 옛날의 히트곡들을 틀어준다. 가끔은 70~80년대의 음악이 나올 때도 있다. 그렇다보니 좋든 싫든 최신곡들에 대해선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음악이, 불과 내가 어렸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도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걸 곰곰히 생각하면서, 음악은 변하는데 사람은 역시 쉽사리 변하지 않는구나, 란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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