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 피하고 싶은 돌발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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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해후 - 피하고 싶은 돌발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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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지내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번 보지 않을 거라면, 아예 영영 마주치지 않고 지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껄끄러운 이유로 다신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중간한 것은 싫기 때문이다. 만날 거라면 계속 만나고, 만나지 않을 거라면 앞으로도 모르는 척 하기를. 어색함은, 어중간한 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싫다. 관계의 원초적인 불안정함을 형성해버린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이 이따금씩, 나한테 갑자기 말을 걸어올 때면 나는 우선 경계부터 하고 본다. 온몸의 감각이 바짝 곤두선다. 부지불식간에 우선 의심부터 하고 본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매사에 의심이 많은 편이 아니다. 오히려 좀 둔하게 무작정 믿고 보는 편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이 사람이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음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냥 맘 편하게, 오, 그냥 오랜만에 내 안부가 궁금했나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또 좋겠지만, 그런다면 예전처럼 훨씬 더 마음이 안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경계와 의심은 인간 관계를 - 혹은, 적어도 내 정신만이라도 -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그런 사람들에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답하게 된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무슨 일 있어? 웬일이야? 특히 마지막에 강세를 두는데, 차근차근 기본적인 것부터 묻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이쯤에서 본심을 털어놓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린 건지, 어떤 사람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목적을 줄줄 말한다. 이쯤 되면 내가 그냥 만만해 보인 건 아닐지 스스로를 의심해볼 정도로.

 

뭔가를 원해서 내게 말을 건 거라면 나는 최대한 대화를 질질 끌고 대답을 흐리며, 상대를 잔뜩 기대하게 한 다음 마지막에 미안, 안 되겠어, 라고 거절하는 방법을 쓴다. 나를 이용하려던 상대에게 역으로 복수도 될 뿐더러, 물 먹이는 쾌감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퍽 자연스러운 거절이 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철면피가 아닌 한은 이 선에서 물러난다. 아주 적절하다.

 

너무 못된 것 아니냐고? 글쎄, 나는 타인을 위해 불필요하게 희생하는 것보다는 좀 나쁜 사람으로 취급 받더라도 제 마음이 편하면 된다는 주의다. 거꾸로 쓰다듬는 손을 참아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하다간 개건 고양이건 그 손을 콱 물어버리기 때문이다. 단지 난 사람이기에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돌려주는 것 뿐이지.

 

그리고 사실,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다가 그저 순수하게 안부가 궁금해 말을 걸었더라도, 나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 동안 네가 날 얼마나 버려뒀는지 새삼 다시 상기시켜줄 거라면 뭐 하러 온 거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는 해도,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마음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앵토라진 어린아이처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착하고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보단 철조망을 치더라도 내 마음이 편한 것이 낫다. 뭐든지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을.

 

나는 혹시라도 남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대체로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교류가 없어지는 건 흔하다.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사교 상황 때문에 피치 못하게 연락처를 교환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미 고독을 즐기는 법을 마스터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란 쉬운 법이 아니고, 그런 나와도 아직까지 연락을 계속 해주는 사람들에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가끔은 나도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해후. 결코 유쾌하거나 반갑지는 않지만, 정 놓을 수 없다면 가끔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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