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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장갑

박지원 0 845 2016.05.26 09:58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어려운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뭔 사람이 그리 복잡하냐며 싫다한다. 너는 이상하다, 고 내가 말했다.

 

나는 정말 장갑이 싫었다. 열이 많은 사람인지라 장갑을 끼면 늘 손에서 땀이 나곤 했다. 가죽장갑을 꼈다가 벗으면 손에서 가죽냄새가 났고, 털장갑을 꼈다 벗으면 손에 털이 묻어나왔다. 그게 싫었다. 예전에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는 손에 밴 가죽냄새와 니코틴 섞인 냄새가 좋았는데, 이제는 가죽냄새 뿐이니 별 재미가 없었다.

 

벙어리장갑은 손가락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벙어리이다. 움직일 수는 있으나 원하는 바의 제스처를 명확히 취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이 없다. 그래서 벙어리이다. 얼마나 잔인하게 표현된 장갑인가.

 

그 잔인하게 표현된 벙어리장갑을 선물 받았을 때, 때는 아직 여름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너무 이른듯 했지만 넣어두었다가 올 겨울에 사용하기로 했다. 벙어리는 말없이 나를 보았고, 나는 고마워서 너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헤어졌다. 헤어짐의 이유라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헤어지려고 헤어진 것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 뿐이다. 

 

오늘 나는 서랍의 구석에서 말없이 웅크리고 있는 파란색 벙어리장갑을 발견했다. 파란 적요 속에서 조용히 구석에 마치- 나는 장갑이 아닙니다, 하는 것처럼 앉아있었다. 서툰 뜨개 솜씨 탓에 한쪽은 엄지가 지나치게 컸고, 한쪽은 엄지는 맞는데 나머지 손가락 네 개가 꽤 힘겹게 들어갔다. 선물을 받을 때에는 몰랐는데, 지금 껴보니 그러했다. 우리의 기억은 여기저기가 너무 컸고 너무 작았다. 까실까실한 싸구려 털실의 벙어리가 어설픈 침묵 속에 내 두 손을 감싸잡고 있었다.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움직여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이곳저곳이 헐렁해지거나, 금방이라도 튿어질 것처럼 꽉 당겨졌다. 복잡한 모양이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했던 네가 복잡한 것을 만들어 내게 주었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했지만 복잡했던 나는, 단순한 벙어리장갑을 받아들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하리만큼 추운 겨울 날씨 속 서랍 앞에 나는 서 있었다. 반쯤 열려진 서랍에 금방이라도 눈이 쌓일 것처럼 눈 밑이 서늘해져왔다. 

 

싫어하면 만들지를 말든가. 

 

속 없이 속 좁은 말을 내뱉으며 장갑을 벗으려 했으나, 이내 팽팽했던 부분이 툭하고 열려져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옆으로 톡하고 삐져나와버렸다. 내 마음같던 벙어리장갑에 구멍이 나서, 말하는 손가락들이 우수수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손가락들이 관절을 여닫으며 내 온몸의 신경을 눈처럼 건드려댔다. 기억이 한없이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무엇인가 소리를 내려다, 내가 끼고 있는 파란색 장갑을 보았다. 그리고 난, 장갑처럼 벙어리가 되었다. 장갑을 낀 손처럼, 감정이 일시에 단순해져오는 경험이었다. 

 

쓸데없이, 나는 미안하고 미안해졌다. 그저 장갑일 뿐인데.

 

나는 장갑을 벗어 서랍 속 구석에 다시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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