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혼자 밥 먹는게 지루하고 따분할 때. 무심히 놓인 식탁 한켠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놓칠세라 내 시선을 붙잡는다.
“어머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리고 힘내세요.”
고른 치아를 자랑하듯 겹겹이 곱게 피어 웃는 그 꽃을 바라볼 때 마다 수 만리 밖에서 사는 나를 위하여 그 꽃을 준비 해 준 자상한 김서방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게 백년 손님으로 가족이 되어준 사람. 어린 나이에 어머님을 여의고 긴 세월 모정(母情)을 그리다가 공휴일엔 가끔씩 내 무릎을 베고 오수(午睡)를 즐기기도 하던. 남자 없는 집에 든든한 새 아들로 언제나 믿업고 정스러운 사람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을 기특하게도 그 꽃은 늘 그렇게 변함없이 웃고있질 않은가 조화도 아닌 생화(?)가....
2007년으로 기억된다.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오월 ‘어버이 날’을 맞이했다. 그 때 나는 사위로부터 카네이션이 아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았다. 생화는 틀림없는데 투명한 유리병 안에 밀봉으로 담겨져 있는게 특이했다. 고운 자태를 유감없이 나타내며 웃고는 있지만 그 꽃이 ‘미라(mirra)’라는건 나중에야 알았다.
삼,사년 정도는 변함 없다니까, 이걸 받으셔야 한다며 내 손에 쥐어준 꽃. 자주 만날 수 없는 처지에 이런게 있다는게 너무나 다행스러워 ‘카네이션’이 아니어서 안된다는 아내의 말도 뿌리치고 사 들고 온 사위. 그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고마움에 답이라도 하는걸까? 반가운 이변이다.
삼 사년을 따불로 넘기고 10년을 코 앞에 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마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처럼 깔끔한채 그대로다.
그걸 여기 가져올 때의 쉽지 않았던 과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행여 깨질세라 여러겹의 종이로 말아 여행가방 옷 속에 깊숙이 묻었다. 귀한 보물처럼.... 뉴질랜드 땅에 내릴 때까지는 무사했다.
아무 생각없이 공항 짐 검색대에 가방을 놓았다. 그런데 남들이 무사히 다 빠져나가는데 나 혼자 옷 가방을 열어야 했다. 옷 속에서 그들이 찾아낸 것은 바로 그 꽃.
“아차 그 생각을 못했구나. 하지만 생화가 아닌데?”
내가 잘못 한 걸까? 라는 죄책감보다 그걸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으로 괜스레 화가났다.
세심한 배려와 정성으로 준비한 사위의 얼굴이 떠 오르면서 그 꽃을 포기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간절 해 졌다. 마음속으로 애원하듯이 빌고 또 빌었다. (돌려주세요.. 그 꽃은 이미 생명을 잃은. 오직 내게만 삶이 허용된 거짓 꽃입니다.)
그들이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 말도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 되면 그렇게 속 시원히 부르짖고 싶었다.
그 것을 들고 온 내 마음을 알았을까?
하찮아 하지않고 조심스럽게 이 방 저 방 들고 다니며 검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다.
어머니 손에 쥐어준 고국의 자식들 정성을 읽기라도 한듯 도와주려는 친절한 태도로 보여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작은 꽃 한송이 - 그냥 버릴 법도한데 최선을 다 하는 그 사람들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이 나라에 살지)
왠지 다시 내 손 안에 쥐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고 슬슬 싱거운 웃음이 번져나왔다.
기다리기에 지칠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웃으면서 다시 돌려주며 미안하다고 했을 때 “땡큐 땡큐” 하면서 그 녀의 손을 덥석 잡았던 치기의 코리안 어머니. 마오리 아줌마인 그녀가 웃어주어 챙피를 모면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살아있는 듯 화사하게 피어있는 새빨간 장미.
순결을 지키는 아가씨의 모습처럼 십년이 되어오는 오늘까지 변함없이 여전한게 그래서 좋다.
요즘 부쩍 그 꽃과 소통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린애처럼 숟가락 들고 밥먹기 싫다는 투정을 자주 부린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맛있는 것 장만해서 많이 드시는게 보약입니다.” 꽃 속에서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듯 소근거리는 소리. 그런 환청(幻聽)의 착각에도 큰 위로를 받으며 밥을 넘긴다.
“고국의 경제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는데 사업 힘들지는 않은가?”
가끔씩 어른스러운 대화도 한다.
비록 작은 꽃 한 송이지만 의미가 담기니 이렇게 대단한 위력이... 가치의 정의를 다시 배우며. 소통하는 가족이 있어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