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함 명 춘
도시의 저녁 길을 걷는다 지친 내 어깨를 안아 줄 한가닥 햇살마저 없는,
꺼질 듯 하다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추억
나는 원래 한나라의 왕자였다 백성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는
만약 마법사의 간계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도 몇몇 신료들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을 것이다
각국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괴석과 꽃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을 것이다
아침마다 나를 잡아 흔들어 깨우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내의 억센 팔뚝 속에서 출근을 서두르고
하루 세 끼 굶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밥 먹듯 야근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천리를 달리는 백마에 루비가 박힌 검을 차고
나의 망토처럼 길게 펼쳐진 초원을 달리며 사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궁전으로 돌아올 때면 포획한 사냥감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이다.
해도 달도 뜨지 않는, 넘기는 족족 파본처럼 뜯겨 나가는
세월의 갈피 속에서 내 비록 한 채 집을 갖는 데 내 목숨을 걸고 늘 바람따라 고분고분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스물 네 개의 감시탑과
최정예 군사들이 성문 밖 시에라네바다 산맥 같이 줄지어 서 있는 곳
그때까지 넘어지거나 눈물 흘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멸시와 슬픔 쯤 한 방에 날려 보낼 것이다
난 사철 눈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새들을 불러 모으고
저녁마다 노을이 무량무량 흘러내리는 알함브라 궁전의 가장 사랑받는 왕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