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 예수님이 첫째와 꼴찌에 대해서 쓴 구절이 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거라는 말씀이었지요. 첫째와 꼴찌가 뒤바뀔 거라는 말이었는데, 왜 그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50여년을 살면서 주위에서 첫째와 꼴찌가 뒤바뀐 것을 보긴 했습니다. 중학교 때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던 친구가 명문대학을 들어가는 것도 보고, 명문대를 나와서도 사회생활을 제대로 잘하지 못하여 삶이 빈곤하고 힘든 친구들도 보아왔고, 가난했던 친구가 부자로 떵떵거리면서 사는 친구에, 형제들 중 제일 쳐졌던 사람이 형제들 중 제일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한 것 등.......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도 첫째와 꼴찌의 뒤바뀜은 늘 있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우리 삶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뜻을 전하는 것인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상을 넘어선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일 겁니다.
첫째와 꼴찌를 구분 짓는 것부터 차별의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타고난 대로 나름 모두 다 특별한 존재들인데, 일정한 틀을 정하여 그 틀에 가장 잘 미치면 첫째이고, 가장 못 미치면 꼴찌라고 판단하는 의식이 만들어 낸 분별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노보라는 직립보행 동물이 있습니다. 원숭이처럼 생겨서 예전에는 원숭이과로 분류를 했었지만, 원숭이와 구별을 짓게 된 것은 그저 종족 번식의 목적으로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섹스를 즐기는 직립보행 동물이라는 데 착안을 두어 따로 구분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구에서 사는 동물들 중 인간과 보노보 만이 섹스를 즐기는 동물이라고 하더군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의식적으로 보노보 보다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보노보 들한테 배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고 대화로 상대편과의 갈등을 풀어나갑니다. 질투로 상대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서로 나누며 협동하면서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평화의 동물이죠.
그룹의 대장이라도 독선적이지 않으며 협의와 양보가 생활이며, 독점하려는 의식이 전혀 없는데다 차별의식 또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보노보에게는 첫째와 꼴찌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다 함께 서로 사랑하면서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 그들의 낙원을 이루면서 살고 있는 것이죠. 에덴의 동산이 따로 없는 곳에서 아담과 이브가 되어 태초의 행복을 그대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동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무척 의아했습니다. 오늘 가만히 생가해 보니,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생각이 생긴 것으로 유추가 되네요.
모든 것들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 다르고, 그 시각으로 보기엔 그 또한 옳은 것인데, 자신의 시각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틀리게 보는 분별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지요. 틀리게 생각이 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첫째와 꼴찌가 도토리 키 재기인데, 굳이 첫째가 되려고 기를 쓰며 꼴찌를 만들어 가면서 우월주의에 빠질 필요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종잇장도 맞 들면 가벼워진다는데, 좀 앞서가는 사람이 뒤에서 못하는 사람을 밀어주면서 함께 나아갈 수도 있는데, 잘한다고 꼭 앞서서 나아갈 필요가 있는지요.
예수님은 더 큰 의미를 전하시는 것이지만 그런 은유법을 사용하여 생각하도록 유도를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꼴찌가 앞서 가고 첫째가 뒤에서 밀어주는 첫째와 꼴찌라는 분별심마저도 사라져서 서로 하나가 된 그런 아름다운 시대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미래는 참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군요. 다시 에덴동산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해주신 것이니까요.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런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날을 기리면서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면서 협력하고 도와가면서 살기만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