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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Ⅶ)

박지원 0 984 2015.07.15 16:54
짐을 모두 싣고 난 후 우리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강변의 물에 바지를 적셔가며 배에 올랐다. 강 위에서의 3일차. 하루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우리는 배가 있는데 왜 물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왜 우리 옷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의 옷은 뽀송뽀송한 것일까. 우리는 왜 머나먼 타국에서 때 아닌 보트피플 같은 행색으로 지내야만 하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upstream이었던 곳을 빠르게 지나쳐, 본류로 다가들었다. 밤새 비가 와서인지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배가 뒤집혀지는 것은 첫날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N과 나는 익숙한 뱃사람인양 노를 들어 하이파이브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둘하나둘. 비온 뒤의 시야가 얼마나 선명한지, 탁해진 강물 위에도 그 색깔을 옅게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날은 새해를 하루 앞둔 2014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보편적으로 조금은 특별하게 생각하는 날에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자니, 헛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도시와 거리, 티비에서 뿌려지는 연말연시의 분위기 속에서 20년 이상 살아온 내게, 이 뉴질랜드- 그것도 심지어 Whanganui 강이라니. 강은 어제와 비슷한 표정으로 우리를 어루만지고 있는데, 이 땅은 내게 있어서 마치 설익은 아이의 눈매처럼 아직도 낯설음이 절절한 곳이었다. 이 곳은 내게 있어서 무슨 의미로 남게 될까.

의미. 그래 때로는,

보신각의 종소리와 가수들의 공연소리, 함성소리, 갖가지 정리와 염원을 담은 수많은 연말연시들이 얼마나 의미없는 일인지. 의미라는 것은, 결국 의미를 부여해야만 의미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공허함”의 또다른 대명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어도 배는 언제든 전복될 수 있고, 자연은 묵묵히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얼마나 치열하도록 무가치한 존재인지. 그런 이유로 인해 위대한 디자이너들이 그토록 자연을 동경하는구나, 라는 생각의 끝. 강을 스쳐지나가고 있는 절벽의 면면이 내 몸을 더듬었다.

절벽은, 시간이 흘린 이끼들과 바람이 그린 돌의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원목이나 MDF가 그리도 흉내내고 싶어했던 패턴으로 조각되어있었다. 절벽은 켜켜이 쌓아낸 과거를 감추지 않았다. 과했던 침식, 우연한 아름다움, 낯선 인간들의 시선. 말로는 형용될 수 없을, 수많은 것들을 가득히 드러내고 있었다. 큰, 사람 같았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는 듯 했다. 강의 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위대한 난간 끝. 웃음 같은, 눈물 같은, 가느다란 폭포들을 쏟아내며 배 위의 우리들에게 무언의 항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날 배 위에서, 절벽이 되고 싶었다. 지나간 비명과 과거의 얼룩, 기억 속 환호와 분실된 청명함을 부러 버무리지 않은 현재의 인생을 당당히 살아내고 싶었다. 새해가 오든, 한해가 가든 그것은 단위의 저급한 개념일 뿐이라고, 하나둘 노를 저으며 생각했다. 그냥 여긴, 그 자체로 현재라고. 

위대함을 저어나가면서 두 군데의 숙박지를 지나쳤다. 세 번째 숙박지에서부터는 숙박지 명칭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었기에, Whakehoro의 Blue Duck 카페에서 비치된 지도를 보고 우선 숙박지 이름을 외워두었었다. 다음 숙박지 이름은 John Coull이었다. 이 곳은 텐트사이트에 예약을 하지 않았었고, Hut에 예약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우선 텐트를 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배를 몰고 갈 수 있었다.

강의 세기와 흐름이 중류라고 생각될 무렵, 우리는 John Coull에 도착했다. 오후 3시. 다시 한번 Whakahoro같은 환상적인 숙박지를 기대했건만, 이번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패키지의 배 대여 기준이 5일, 3일, 1일로 보통 짜여져 있는데, 3일을 선택한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 때에서야 느꼈다. 우리는 참 용감하게, 무려 5일로 배를 대여한 것이었다. 노 한 번 저어본 적 없으면서.

우리는 많은 텐트들이 설치되어 있는 잔디밭을 지나쳐 헛(Hut)을 우선 가보기로 했다. 헛 앞에 가니 앞니가 하나 없는 마오리 아저씨가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우리를 반겼다. 헛 내부에 진입했다. 우리는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헛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군대식 평상이 길게 늘어져 있는 곳이었다. 이미 몇 사람은 항해에 지쳤는지 침낭을 덮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아아, 우린 그 곳에선 잘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누워 자는 것이 싫은 나. 잠귀가 밝은 N. 마오리 아저씨에게 우리 그냥 텐트에서 자도 되겠냐고 물어보니 괜찮다며 흔쾌히 대답해주셨다. 사람이 점점 많이 오고 있는 것 같아 빨리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우리는 급하게 배를 정박해둔 곳으로 내려가 텐트를 가져왔다.

텐트에 누워 와인을 마시며 열어둔 문 밖으로 산을 보았다. N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일은 최대한 일찍 배를 타고 나가 일찍 자리를 잡기로 했다. 우리는 주변의 텐트들과,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우리 팀과 아일랜드 커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늘이 첫 날인 듯 싶었다. 상류의 거친 물살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용기있는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웃어주었다. 비웃음이 굳이 정당하진 않았다. 오늘 저녁은 파스타였다.

일찍 자기로 했기에 우리는 8시에 자기로 했다. 새해가 오든 말든 상관없는 자연 속에, 우리는 들어와 있었다.

12시에 잠이 깼다. 사람들이 새해를 축하하는 건배를 하고 있었다. 다시 잤다. 우리 주변에 포썸이 아닌 건배소리가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며 잘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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