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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Ⅴ)-패

박지원 0 1,009 2015.04.30 13:02
우선 너무 기쁜 나머지 바로 답 메일을 보냈다. 보낸 답장은 내가 찍었던 단편영화가 첨부된 채였다. 그 의도는 “나는 이러이러하게 쓸모가 있으니 투자 대비 괜찮을 겁니다”의 의미였다. 사장에게 메일이 직접 왔으니 사장에게 직통으로 메일이 갔을 터였고, 그것은 단번에 “읽음”으로 표시가 되었다. 나는 전문가에게 들려주지 못했었던 내 음악이 그래도 대형 인디 기획사 사장의 눈에 띄었다는 사실- 메일을 읽었다는 것조차도- 그 자체가 기뻤다.

첫 번째 답변 메일까지는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나치게 조바심이 난 나는 두 달 이상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분명 많은 양의 데모음악들이 매일매일 기획사로 보내지고 있을 터였고, 두 달 정도 뒤에는 잊혀질 수 있다는 예상을 하게 되었다. 잊혀지지 않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첫 번째는 내가 한국에 있는 기획사로 찾아가 얼굴도장을 찍고 오는 방법. 하지만 나는 뉴질랜드에 산다. 물리적으로 조금 벅찬 일이었다. 두 번째는 발매할 음악 외에 지금까지 만든 음악들을 2주에 하나씩 보내는 방법. 나름 센세이셔널하고 소재가 좋은 곡들을 선별해서 평가를 물어보는 겸해서 다시 한번 내 음악의 평가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잊혀지지 않게 만들게 할 좋은 물 밑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작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내 음악이 검증되지 않은 음악이라는 점. 기획사 한 군데에서 좋다고 했다지만 내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장르파괴 지향적이었기에 음악별로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당시 제출 앨범은 컨셉 앨범이었기에 그나마 통일성 있는 음악으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음악을 배워본 적이 없다는 점은 당연히 큰 약점이 될 터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음악이 내 “패”라는 점이었다. 패를 감추고 있는 것이 좋을지, 패를 조금씩 내보이는 것이 좋을지 당시에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평소에 협상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이런 “음악가”와 “기획사” 입장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결국 이런 많은 생각들이 거대한 조바심이 되어 스스로를 짓누르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갖고 있는 패가 좋다고 믿기로 했다. 좋은 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쥔 패를 누구에게 보여준다 한들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7월, 8월. 두 달 정도를 마지노로 잡고 2주에 한 곡씩 보내며 나름의 영업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답장이 없었다. 9월, 10월. 마침내 나는 포기라는 단어가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음은 상황과 심리의 정리다.

처음 곡을 만들 때는 재미로 만들었던 것이, 곡이 쌓이다보니 앨범을 내고 싶어졌다. 원래는 돈을 주고 내려던 앨범을 재미삼아 기획사들에게 돌렸고 그 중 가장 거물급 기획사가 내게 연락이 왔다. 그들은 나를 향해 기다리라 했다. 그리고 답이 없다. 돈을 주고 내려던 장난 같았던 앨범은 이미 때 아닌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당연히 마음속에서는 그 가치가 한없이 높아져있었다. 끌어내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끝내 나는 완전히 끌어내리기 위해 “마지막 메일”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냈고, 곡은 첨부하지 않았다. 다만 신문기사 하나를 첨부했다. <불친절한 채용전형…기업들, 불합격 통보 안 해> 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답장이 왔다. 아주 예의바르고 친절한 답장이었다. 좋은 회사다. 회사의 사정 등을 설명하며 지원 씨 음악의 콘텐츠 발매는 조금 힘들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패를 너무 많이 보여준 나의 실수라는 생각이 우선은 크게 들었고, 어찌되었든 확실한 정리였다. 예상을 하고 있었던 낭패감 위에 패배감, 짜증, 고마움 등 온갖 감정이 곧이어 나를 감쌌다. 다른 기획사에 보내자니 그것도 싫고(내게 기다려달라고 했던 곳이 워낙 거물이었다), 돈 주고 내자니 그것도 마음이 잘 가지 않았다.

일단은- “앨범을 내보자”라는 장난스러웠던 초심이,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초심을 찾는 데에는,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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