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지났다. 해가 갈 수록 나이를 먹는 것이 점점 빠르게 체감되어 안타까웠다.
어렸을 적엔 생일이 아주 즐겁고, 매년 손꼽아 기다리곤 하는 연중 하이라이트였는데, 그 특별함이 시나브로 무뎌지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다. 파티도 열 세 살을 넘긴 이후론 열어본 적이 없는 것 같고, 다소 형식적이긴 하지만 진심인 축하는 간단히 끝난다. 그리고 이젠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태어난 날짜의 특이성에 무덤덤해지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탄생에 대한 복잡한 사연 - 그러니까, 스스로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고, 태어난 것이 꼭 좋은 것일까 하는, 다소 진부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그런 고민 - 을 깨닫고 나서였던 것 같다. 그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거치는 것이라면 모를까. 내겐 유독 그 불가해성이랄까, 요란하게 표현하자면 ‘삶의 무작위성’에 생각의 문턱이 걸쳐져 버려서,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축하는 언제 받아도 기쁘긴 하다 (그리고 선물도). ‘네가 태어나서 다행이야’, ‘네가 여기 있어서 기뻐’라는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겠냐마는.
생일날 친구를 부르지 않게 된 건 아마도 음식이며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엄마라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도 점점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귀찮아지기도 했고, 이제는 전화로든 인터넷으로든 간단히 축하 인사만 나눈다. 축하해주는 사람들 또한 조금씩 줄어들었어도 그것도 나쁘지 않다. 아주 가깝고,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만 내 생일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중 한 명, 유독 특별한 친구가 있다 (편의상 K라고 부르기로 하자). K는 내가 어디에 있던 매년 선물을 주고 받는 사이다. 거의 십 년 넘게, 가장 오래 알고 지냈던 사이이니 평소엔 굳이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생일처럼 중요한 날엔 되도록이면 많이 챙겨주는 편인데, 올해도 어김 없었다. 갖고 싶었던 책과 함께 보내온 편지엔 우리가 어떻게 처음 만났었는지 그녀의 시점에서 설명된 것을 보고 오랜만에 한참을 웃은 것 같다. 아, 그때 이렇게 생각했었구나. 우린 참 먼 길을 걸어왔구나. 일종의 이정표처럼.
선물 외에도 생일엔 꼭 지내는 의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부모님께 선물을 하나씩 드리는 것이다 (내가 받는 게 아니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지는 ‘제작 기념 축하 선물’ 같은 것인데, 다른 집들도 이런 것을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것을 매우 당연시한다. ‘생일은 널 축하해주는 게 아니라 널 낳아주고 키워주느라 수고한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해가 갈 듯도, 말 듯도 한 아리송한 말이다. 내게 있어서 생일은 또 다른 1년 동안 잘 살아남은 나 자신의 등을 토닥거려주는 날쯤이고, 주변 사람들은 1년 늘어난 나와의 관계를 축하하며, 부모님은 나를 낳고 키운 날에 보답을 받는 날이라고 여기니. 같은 생일인데 모두들 제각기 생각하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과 가족에게 고맙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던 그렇지 않던 간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 건 그 분들 덕분이고 작은 보답이나마 하는 것이 당연하니.
애초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글을 끄적이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내 생각들을 지금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테니까 (비록 그 방식이 지독히 일방적이긴 해도). 그런 의미에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