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이슈들을 이해하도록 여러 단체들에서 여는 워크샵에서 강연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의 대학입학이나 진로문제에 대해 대단히 헌신적으로 보이는 데 반해, 정반대로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가질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하다. 내 자녀들에게는 문제들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막연한 믿음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런 워크샵들을 다니면 마치 내 아이에게 문제라도 있다고 주변에서 생각할까 아예 그런 제목이 붙은 강의들은 들으러 발걸음도 하고 싶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둘 다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면 문제가 심각한 자녀를 가진 부모들도 막상 도움을 받으러 전문가들을 만나는 것에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문화는 체면이 중요하다. 아무리 문화가 달라졌다 해도 그 뿌리는 쉽게 뽑히는 것이 아니여서 아직도 그리고 이 뉴질랜드 환경에서 조차도 아니 오히려 이 좁은 이민사회안에서 남들의 시선은 더 뜨겁고 의식되는 듯 하다. 게다가 어느 공동체에 속해 있기라도 하면 비교의식이나 체면은 강해져서 문제의 심각성이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내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찾는 다던가 주변의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추기에 급급하고 창피하게 여김으로 인해 힘든 문제에 처해 있는 자녀들에게 오히려 그런 부모의 모습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생각되어지면서 문제보다 더 큰 상처들을 자녀들에게 안겨주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가끔씩 부모들에게 ‘학교 다닐 때 모범생이셨나봐요?’라고 묻는데 이는 십대 이십대의 자녀들이 겪는 삶의 문제들이나 방황하는 모습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을 보기 때문이다. 방황하는 청춘, 질풍노도의 시기… 그런 말들이 자녀들에게는 해당되고 부모들에게는 비껴간 말들이었나 보다. 도무지 자녀들이 겪는 혼란들을 방황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나는 너 나이에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부모들이 많은 걸 보니 그렇다. 그러다보니 체면의 문화에 젖어있는 부모, 방황을 이해 못하는 부모가 되고 자녀들이 겪는 문제들의 심각성에 비해 도움을 청하는 경우들은 극히 드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주변에서 예를 들어 학교에서나 공동체 안에서 아이에 대해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해주고 도움을 받을 것을 청하는 경우에도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괜찮은 내 아이를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서 서운해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학교를 옮기기도 한다. 오히려 부모가 내 아이를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겠다고 손을 내밀어도 뿌리치는 형상이니 안타깝지 않을 수 없고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16세 미만인 자녀들은 부모의 동의가 없이는 강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없기 때문에 방치되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다 보면 문제가 점점 커져서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러서야 조금씩이나마 도움을 받아들이는데 이쯤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도 힘들어지고 지원하려던 학교나 단체들에서도 그 전만큼 열의를 보이지도 않는다. 부모가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아 일이 커졌는데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냐는 것이다.
문제는 해결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부끄러워하고 감추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늘 문제의 연속이고 그것들을 통해 성숙해가고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