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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의 대상이 사라졌다? (가급적 근사원칙)

이동온 0 2,181 2014.05.13 09:52
필자에게는 ‘기부’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김밥할머니’를 기억하시는 독자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필자에게는 ‘기부’하면 항상 김밥할머니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한 년도나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평생 김밥을 팔아 모아온 돈 오십억여 원을 한 대학에 기부한 것으로 기억한다.  김밥할머니 후에도 잊을만하면 콩나물 할머니, 폐품 할머니, 삯바느질 할머니, 날품팔이 할머니로 기억되는 할머니들의 기부 소식에 훈훈함을 느끼곤 한다.

뉴질랜드에도 알게 모르게 독지가들이 존재한다.  크게는 1901년 오클랜드 시민의 휴식처인 콘월파크를 기증한 존 캠벨경부터, 딜워스 학교 재단을 설립한 제임스 딜워스가 유명하고, 얼마 전에는 공원이나 학교에 비하면 작을지 몰라도 오클랜드 공항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항의하고자 하는 소시민들에게 신문 전면 광고를 낼 수 있게 도와준 익명의 독지가도 언론에 보도 된 적이 있다.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생전에 자신이 직접 기부를 할 수도 있고, 유언등을 통해 사후에 재산을 기부할 수도 있는데, 통계자료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한국보다 유언을 통한 기부의 비율이 높은 듯 하다.  그런데 말이다, 마음씨 좋은 독지가가 유언을 통하여 통 큰 기부를 했는데 기부를 받을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에이 그런일이 있으려고…하시는 독자도 있겠지만,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비교적 최근 고등법원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하나 살펴보자.  잭 옥슬리(이하 옥슬리)라는 사람은 죽기 전에 유언을 통하여 랑기오라라는 타운에 있는 “Meals on Wheels”라는 단체에 전 재산의 반을 기부하였다.  “Meals on Wheels”이란 카트 같은 것에 배달하는 식사라는 뜻인데, 옥슬리가 타계한 1989년에는 “Meals on Wheels”라는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적십자(Red Cross)가 당시 비슷한 개념으로 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에 옥슬리의 유언장을 집행하던 신탁 관리인은 옥슬리가 기부하고자 한 자금에서 나오는 (이자)소득을 적십자에 제공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랑기오라에는 장로교단에서도 Meals on Wheels를 제공하게 되었고, 이에 신탁 관리인은 옥슬리가 기부한 재산을 둘로 나누어 반은 적십자에 그리고 나머지 반은 장로교단에 분배할 것을 제안한다.

고인의 남긴 유언은 유언장에서 명시한 그대로 존중되고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특정 유산을 받을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사라진 다음이라면 그 다음 상속자에게 우선 순위가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인이 남긴 유산이 자선단체에게 전달하고자 한 기부금이라면 해당 자선단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고인의 다음 상속자에게 유산이 넘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영미 형평법에는 cy-pres doctrine(가급적 근사원칙)이 존재한다.  (유언을 통한) 신탁자의 의도가 일반적인 기부의 목적일 때, 유산의 처분에서 원 목적달성이 불가능할 경우 가장 근접한 것으로 대체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즉, 유언장에 명시된 수혜자가 사라지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 고인의 의도에 따라 신탁재산을 처분하기 위해 다른 근접한 수혜자로 대체하는 것이다.  가급적 근사원칙은 뉴질랜드에서는 Charitable Trusts Act 1957(공익신탁법)을 통해 그 적용 범위가 넓어졌는데, 옥슬리의 기부금도 가급적 근사원칙과 공익신탁법의 적용을 받아, “Meals on Wheels”라는 자선단체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비슷한 목적을 가진 다른 단체인 적십자와 장로교단에게 분배될 수 있었다.

가급적 근사원칙이 적용된 다른 예로는, 고인이 특정 지역에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종교단체에게 땅을 기증하였지만 해당 지역의 인구가 줄어 학교 설립이 불가능해진 경우, 고인이 특정 이름을 가진 동물학대 방지단체에 기부하였으나 그런 이름을 가진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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