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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0 개 2,088 박건호
또 비가 온다. 일주일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시간 몇 가지가 있다.

아주 어렸던 16살에, 나는 독특한 패션으로 거리를 쏘다녔었다. 거대한 굽을 가지고 있는 구두 위에 검은색 스키니진,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번쩍거리는 체인들. 온갖 뜻 모를 글자가 적혀진 색이 바랜 티셔츠와 검은 라이더스. 왁스로 범벅을 한 머리는 항상 빳빳했고, 얼굴은 새하얗게 화장을 하고 다녔다. 그 얼굴 위에는 선글라스에 가까운 색안경을 착용했다.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끼고 다녔고, 양 손목에는 늘 팔찌가 찰랑거렸다. 지금도 흔치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당시 여자친구의 패션 또한 비슷했다. 그렇게 둘이 손을 잡고 온 거리의 주인이 된 것처럼 쏘다녔다. 우리는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을 좋아했다. 늘 장마철이 오면 커다란 수건을 가방에 넣고, 미지근한 비에 온몸이 흠뻑 젖으면, 근처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머리와 비가 잔뜩 묻은 젖은 옷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술을 마셨다. 옥탑방에 살던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파전을 종종 해먹고는 했었다. 촌스러운 초록색 갑바천 아래에서, 혼자서 때로는 여자친구와 가끔은 친구들과. 막걸리와 파전, 구운 두부같은 것들을 먹고는 했다. 갑바천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빗물을 떨구어내고, 파전은 기름 위에서 치이이익 하며 익는다. 빗물이 조금 묻어있는 막걸리 병들이 서로의 손을 오가고, 밤이 되도록 비는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후덥지근한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뜨겁게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어딘지 모를 가여운 평화의 시간. 그 고요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고 느끼며- 수다를 떠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들.

군대에서의 비는, 정말 굉장한 추억이다. GOP에 올라가기 전의 마지막 훈련. 나는 심한 변의를 느끼고 삽을 들고 숲 속으로 향했다. 열심히 땅을 파고 바지를 내렸다. 순간 엉덩이 아래로 쏟아졌던 김이 펄펄나는 건강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안경 위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가 보는 풍경을 점묘화로 물들였고, 나의 배설은 빗소리와 함께 상쾌하게 땅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것은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상실이었다. 내 속의 모든 장기들이 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내 안에는 오로지 심장의 고동과 빗소리만이 온 천지의 편안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웰링턴에 온 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다. 그 아이의 퇴근시간은 저녁 너머쯤이었다. 파란 비를 맞으며 주황색 귤을 들고 그 아이가 일하는 곳으로 갔었다. 깜짝 놀라는 여자의 표정은 생각보다 보기가 좋은 것이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귤을 내밀었고, 그 아이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가 오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될일이었지만, 같이 걸어주는 것이 참 좋았다. 빗방울들은 유난히 그녀의 얼굴을 좋아했다. 금방 세수라도 한 듯 촉촉해지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 나는 빗방울들이 부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손수건을 챙겨야겠군.

요즘처럼 비가 계속 내린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비를 맞았다. 비 묻은 귤을 하나씩 까주고, 손수건으로 비를 닦아주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빗속을 부드럽게 유영했고, 절제를 잃고 곤두박질치려는 내 마음을 식물처럼 다잡았다. 다행히 우리는 이제 손을 잡고 있다.

비가 계속 해서 내린다. 전할 길 없는 그리움이 노력하지 않아도 시각화되어서 내 눈 앞에서 낙하한다. 검은 아스팔트 위의, 빗물에 젖은 벚꽃의 잎사귀들이- 마음의 손가락에 하나씩 걸려오는 어떤 존재의 쓸쓸함 같았던 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존재의 그리움이 나를 오히려 외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조금은 넓어진 혹은, 포장된 공감의 나이가 된 것인지.

외롭고, 의존적인 사람들

댓글 0 | 조회 5,758 | 2013.06.26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보통 잠이 오지 않으면 가까운 바닷가로 나가 혼자 돌아다니다 오곤 한다. 핸드폰은 꺼두고 엠피쓰리만 켜두고 이곳저곳 쏘다닌다. 그런데 그것… 더보기

치과 (Ⅰ)

댓글 0 | 조회 3,666 | 2016.04.29
N과 함께 밥을 먹는데, N이 요즘 따라 자꾸 볼살을 씹는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양치를 하러 갔었던 N이 달려와 플래시를 켠 핸드폰을 건냈다. 사… 더보기

담배

댓글 0 | 조회 2,689 | 2014.03.26
담배를 피운지는 조금 되었다. 미성년자를 벗어나기전부터 피웠으니 꽤 오래된 셈이다. 내가 좋아하게 되면 으레 그렇듯, 조금은 극단적으로 파고들었다. 담배가 신제품… 더보기

작업기 (Ⅰ) 작곡의 시작

댓글 0 | 조회 2,605 | 2014.05.13
음악 그 자체를 동경해왔었다. 이런 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저런 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냥 소리가 각자 다르다는 것이 신기했다. 책상 구석의 똑같은 … 더보기

작업기 (Ⅱ) 알 수 없는 인생

댓글 0 | 조회 2,585 | 2014.05.27
내가 곡을 쓰는 방식은 사실 굉장히 간단했다. 가사를 주욱 써 놓고, 기타로 코드를 하나씩 잡다가 맘에 드는 코드 진행 방식을 찾는다. 그리고 흥얼흥얼거리며 가사… 더보기

파랑과 검정

댓글 0 | 조회 2,529 | 2016.03.24
인식이 색깔을 바꾼다.아주 어렸을 때, 내게는 스물네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던 크레파스가 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색깔을 닳도록 사용하고는 했는데, 그 중 하나가 … 더보기

댓글 0 | 조회 2,438 | 2016.02.25
무뎌진 발 뒤끝의 아릿함. 침대 위에서 내려오던 내 발 뒤꿈치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던 옷가지들도. 방 안 가득 베어있던 담배향들도. 익숙한 손가락의 까칠함에 … 더보기

B 에게

댓글 0 | 조회 2,381 | 2015.11.12
안녕하세요. 동갑이지만, 매우 친한 사이이지만, 이번 편지에서는 말을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편지를 쓸 때의 제 문체 성향 탓이니, 우리 사이가 멀어… 더보기

작업기(Ⅵ)- 발매 그리고 사기

댓글 0 | 조회 2,332 | 2015.05.27
초심을 찾기까지 아무런 곡을 작업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12월, 1월, 2월이 지나갔다. 긴 크리스마스 휴가와 왕가누이 여행, 부모님의 방문 등 그 사이에 … 더보기

화이

댓글 0 | 조회 2,315 | 201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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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Ⅸ)

댓글 0 | 조회 2,225 | 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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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219 | 2015.12.10
사실 욕망이란 잃었을 때, 비로서 서서히 그 욕망의 실체를 드러낸다. 거기까지 썼을 때, 카페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깊게 눌러쓴 검은 캡 모자, 닳아빠진 … 더보기

자녀들의 나이 값을 쳐주는 부모

댓글 0 | 조회 2,200 | 2015.01.14
너무 되바라진 아이들을 보면 사실 인상이 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 특히 한국부모이기 때문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나 공공장소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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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94 | 2015.12.22
약 혹은 총기류를 쓰지 않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살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목을 매는 자살인 교사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투신의 방법. 노인… 더보기

식물과 생각

댓글 0 | 조회 2,193 | 2016.01.28
8월부터, 웰링턴을 떠나 여기에 온 후 많은 식물을 재배하고 있다. 고추, 애호박, 피망, 해바라기, 토마토, 가지.. 주로 먹을 것들인데, 이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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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84 | 2015.11.26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반장이 되었다. 그 때는 반장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학급회의를 주재하고, 선생님이 없을 때 아이들을 조율하고.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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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80 |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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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Ⅱ)

댓글 0 | 조회 2,158 | 2016.05.11
N의 동동거리던 발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의사가 주사바늘을 N의 입 속에서 뺀 이후였다. 기절했나? 나는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N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각도였… 더보기

어떤증명

댓글 0 | 조회 2,150 | 2012.09.26
어느날 바닷가 주변을 친구와 걷고 있을 때, 지붕이 없는 스포츠카 한 대가 지나갔다.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닷가 근처인데, 한국과는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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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41 | 2015.09.24
화가 난다. 그것을 틱낫한은 이렇게 표현했다. 온 몸 가득 독이 퍼진 것이라고. 독이 퍼진 것을 알아달라는 표현이니까, 상대방은 화난 사람에게 연민을 가져야 한다… 더보기

댓글 0 | 조회 2,122 | 2015.10.15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 어처구니없다, 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 없다, 라는 것은 감정의 한 종류니까요. 제가 지금 감정이라는 것을 가질… 더보기

작업기 (Ⅲ) 요괴의 기다림

댓글 0 | 조회 2,108 | 2014.06.25
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만히 무엇인가 보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구름을 입에 문 새들이 태양 근처로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 나뭇잎을 습관적… 더보기

현재

댓글 0 | 조회 2,089 | 2014.04.23
또 비가 온다. 일주일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시간 몇 가지가 있다. 아주 어렸던 16살에, 나는 독특한 패션으로 거리를 쏘다녔… 더보기

안경

댓글 0 | 조회 2,052 | 2016.02.11
오빠가 사라졌다.안경이 너무 오래도록 보이지 않아 이상한 느낌에 오빠의 방에 가보았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냄새에 비해 꽤 정갈한, 빛이 들지 않는 방이 눈에 들… 더보기

도박

댓글 0 | 조회 2,048 | 2014.08.27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바다이야기”라는 곳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파닥파닥거리며 버튼을 누르고 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