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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0 개 2,102 박건호
또 비가 온다. 일주일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시간 몇 가지가 있다.

아주 어렸던 16살에, 나는 독특한 패션으로 거리를 쏘다녔었다. 거대한 굽을 가지고 있는 구두 위에 검은색 스키니진,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번쩍거리는 체인들. 온갖 뜻 모를 글자가 적혀진 색이 바랜 티셔츠와 검은 라이더스. 왁스로 범벅을 한 머리는 항상 빳빳했고, 얼굴은 새하얗게 화장을 하고 다녔다. 그 얼굴 위에는 선글라스에 가까운 색안경을 착용했다.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끼고 다녔고, 양 손목에는 늘 팔찌가 찰랑거렸다. 지금도 흔치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당시 여자친구의 패션 또한 비슷했다. 그렇게 둘이 손을 잡고 온 거리의 주인이 된 것처럼 쏘다녔다. 우리는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을 좋아했다. 늘 장마철이 오면 커다란 수건을 가방에 넣고, 미지근한 비에 온몸이 흠뻑 젖으면, 근처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머리와 비가 잔뜩 묻은 젖은 옷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술을 마셨다. 옥탑방에 살던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파전을 종종 해먹고는 했었다. 촌스러운 초록색 갑바천 아래에서, 혼자서 때로는 여자친구와 가끔은 친구들과. 막걸리와 파전, 구운 두부같은 것들을 먹고는 했다. 갑바천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빗물을 떨구어내고, 파전은 기름 위에서 치이이익 하며 익는다. 빗물이 조금 묻어있는 막걸리 병들이 서로의 손을 오가고, 밤이 되도록 비는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후덥지근한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뜨겁게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어딘지 모를 가여운 평화의 시간. 그 고요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고 느끼며- 수다를 떠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들.

군대에서의 비는, 정말 굉장한 추억이다. GOP에 올라가기 전의 마지막 훈련. 나는 심한 변의를 느끼고 삽을 들고 숲 속으로 향했다. 열심히 땅을 파고 바지를 내렸다. 순간 엉덩이 아래로 쏟아졌던 김이 펄펄나는 건강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안경 위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가 보는 풍경을 점묘화로 물들였고, 나의 배설은 빗소리와 함께 상쾌하게 땅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것은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상실이었다. 내 속의 모든 장기들이 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내 안에는 오로지 심장의 고동과 빗소리만이 온 천지의 편안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웰링턴에 온 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다. 그 아이의 퇴근시간은 저녁 너머쯤이었다. 파란 비를 맞으며 주황색 귤을 들고 그 아이가 일하는 곳으로 갔었다. 깜짝 놀라는 여자의 표정은 생각보다 보기가 좋은 것이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귤을 내밀었고, 그 아이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가 오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될일이었지만, 같이 걸어주는 것이 참 좋았다. 빗방울들은 유난히 그녀의 얼굴을 좋아했다. 금방 세수라도 한 듯 촉촉해지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 나는 빗방울들이 부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손수건을 챙겨야겠군.

요즘처럼 비가 계속 내린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비를 맞았다. 비 묻은 귤을 하나씩 까주고, 손수건으로 비를 닦아주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빗속을 부드럽게 유영했고, 절제를 잃고 곤두박질치려는 내 마음을 식물처럼 다잡았다. 다행히 우리는 이제 손을 잡고 있다.

비가 계속 해서 내린다. 전할 길 없는 그리움이 노력하지 않아도 시각화되어서 내 눈 앞에서 낙하한다. 검은 아스팔트 위의, 빗물에 젖은 벚꽃의 잎사귀들이- 마음의 손가락에 하나씩 걸려오는 어떤 존재의 쓸쓸함 같았던 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존재의 그리움이 나를 오히려 외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조금은 넓어진 혹은, 포장된 공감의 나이가 된 것인지.

작업기(Ⅳ) 기다림의 결과

댓글 0 | 조회 1,396 | 2015.03.25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과정을 모르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그러하다. 마치 누군가가 미래의 로또번호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몇 회 차인지 가르쳐주지 않… 더보기

江(Ⅲ)

댓글 0 | 조회 1,435 | 2015.02.25
노로 어떻게든 뭍을 박차고 배의 방향을 겨우겨우 돌려, 우리는 다리를 저는 아저씨와 아일랜드 커플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정말 걱정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더보기

江(Ⅱ)

댓글 0 | 조회 1,729 | 2015.02.11
배에 배럴들을 묶는 법을 확인한 후, N과 나는 대머리 아저씨의 낡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버스에서는 강 냄새가 났다. 비린 버스였다. 거리를 달리는 동… 더보기

江(Ⅰ)

댓글 0 | 조회 1,574 | 2015.01.29
등산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때로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을 못 … 더보기

자녀들의 나이 값을 쳐주는 부모

댓글 0 | 조회 2,207 | 2015.01.14
너무 되바라진 아이들을 보면 사실 인상이 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 특히 한국부모이기 때문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나 공공장소에… 더보기

영어

댓글 0 | 조회 1,924 | 2015.01.13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외국인에게 크게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학원은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영어회화학원만큼은 꾸준히 다녔던 것이 비결 아닌 비… 더보기

한뼘

댓글 0 | 조회 1,353 | 2014.12.24
카페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각 오후 6시. 조금씩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노을들이 수면 위의 카페를 빛내고 있었다. 폐선을 개조해서 만든 건지. 디자인 컨셉을 그렇… 더보기

반뼘

댓글 0 | 조회 1,612 | 2014.12.09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 더보기

상류

댓글 0 | 조회 1,899 | 201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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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댓글 0 | 조회 1,604 | 2014.11.12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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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053 | 201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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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91 |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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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한으로, 처음 내가 접했던 종교는 불교였다. 10살 무렵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갔었던 산 속의 어느 조그만 절. 그 절은 정말 깊은 산 구석에 있었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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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근육이란 것을 키워봤다. 펑크에 빠져있던 고등학교 무렵에는 비쩍 마른 몸을 좋아했다. 44사이즈를 입을 수 있는 상체에 디올옴므 모델과도 같은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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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만히 무엇인가 보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구름을 입에 문 새들이 태양 근처로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 나뭇잎을 습관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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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572 | 201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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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 (Ⅱ) 알 수 없는 인생

댓글 0 | 조회 2,596 | 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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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기 (Ⅰ) 작곡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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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2,103 | 201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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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독재의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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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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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운지는 조금 되었다. 미성년자를 벗어나기전부터 피웠으니 꽤 오래된 셈이다. 내가 좋아하게 되면 으레 그렇듯, 조금은 극단적으로 파고들었다. 담배가 신제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