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접속>, <공감>,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수많은 애틋한 만남들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미필적 대본 속 우연들이 교집합되어 소통의 부재와 해소의 극적인 드라마를 나타낸 90년대,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의 노스텔지어 영화물들이다. 난 이 영화들을 좋아한다. “커피 같은 것”과 함께 이 영화를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커피 같은 것의 향”이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언젠가는 비슷한 느낌의 노스텔지어가 될-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은 내가 혐오하는 매체들 중 하나다. 이것들은 나를 끔찍하게 얽매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나른하게 고양이처럼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다. 앞서 나열한 영화들을 본다거나, 조용히 있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른함을 깨는 연락들이 꼭 있다. <뭐하세요?> <뭐해요?> 등등, 내가 뭘하는지 참 궁금해 한다. 난 내가 뭘 하는지 알고 있으므로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러므로 씹는다. 그러면 영화 속 한석규는 허허허 웃고, 유지태는 지나간 과거의 기록에 불과한 연인에게 애틋한 감정을 표정으로 지어낸다.
누군가를 대할 때 상대방에 대한 신비감, 혹은 호기심을 잃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나 혼자 있는 방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리는 느낌.
새벽 2시에 전화와서 뭐하냐고, 나오라고 하는 아이. 새벽 4시에 카톡을 100개 가까이 날려 다음날 읽어보면 본인 힘든 거 알아달라는 얘기(한 문장을 5개의 말풍선에 쪼개 보내는 건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일을 하기에 전화를 꺼놓기도 그렇고, 최근엔 할 말이 있으면 제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고 있다.
누군가와 항상 접속 상태가 유지되어 있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줄곧 삐삐를 들고 다니던 한 연예인이, “누군가가 위급한 상황이나 내가 마지막 통화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내 이기심 때문에 못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필요할 때 내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더라.”는 이유로 핸드폰을 구입했다고 한다.
문제는 저런 상황이 아닐 때, 접속 상태의 편리함을 남용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견디거나 고독을 즐기는 방법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다. 외로우면 누군가를 찾고, 굳이 만나지 못하더라도 얼굴도 못 본 채 하는 대화를 조그만 액정화면 속에서 이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그들을 더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더 외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나도 더 외로워지고 싶지 않기에 만남을 최대한 줄이려한다. 그들은 모른다, 혹은 모른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비어가는 자신을 모르고, 그 비어가는 자신을 불현듯 깨달을 때마다 채우려 애쓰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 외로워보인다는 것을 모른다. 애시당초 비어있는 채로 완성된 고독이란 단어를 왜 채우려하는지. 차라리 심심해서 가끔 불러낸다면 이해하지만, 외로움을 알아달라고 불러내고 막상 만나 대화가 순간적으로 끊겼을 때 곧바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슬픈 영상. 그 영상 안에는 만남이 가지는 애틋함도 낭만도 아무 것도 없다. 해후의 순간을 잃어버린 사회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그렇게 수많은 대화 장치를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보유하고 있으면서, 또한 어느 나라보다 더욱 화려하게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는 정작 힐링이 유행이다. 대화로 모든 것을 풀 수 있을 것처럼 떠들어대던 이들이 왜 힐링이 필요해 질만큼 외로워졌는지. 물론 힐링이 필요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일 것이지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셜 네트워크의 극대화와 힐링의 유행이 동시에 이뤄지는 나라”는 조금 이상하다.
21세기 들어서, 수많은 얼굴들이 있다. (이름도 FACEBOOK이다) 수많은 얼굴들이 각자 자신에게 맞는 각도와 조명을 찾아 스스로를 찍어내어 올린다. 연예인 가십지 넘겨보듯 남들의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성격과 남들이 봐줬으면 하는 한 얼굴의 고민들을, 또다른 얼굴들은 밥을 먹으며 똥을 싸며 훌훌 넘겨본다.
이젠 오래된 영화에서나 보고 그리워하는 그 때처럼,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만남 그 자체에 애틋한 낭만을 갖고 싶다. 아주 오래 전처럼, 그 사람들의 얼굴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