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위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발생하는 거대한 은회색 강당에 빨간 사과를 쥔 채 서 있었다. 너는 손을 들어 은색 기둥을 매만지고, 빨간 사과는 은색 기둥에 유난히 눈에 띄게 반사되어 마치 빨간 사과만이 이 강당 안에 홀로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너는 사과를 내려 놓았다. 거대한 소리가 강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과는, 조금씩 바닥 위를 구른다. 나는 2층의 유리난간에 기대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워져 버린 외로움 같은 것들이 하늘 위에서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넌 내게 그 때 우리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끌어안고, 햇살로 가득 찬 옥상 위에서 넌 내게 우리가 이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나는 너를 조금 더 끌어안는 것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건물 위에서 건물 아래의 너를 보고 있다. 사실 그 때, 우린 알고 있었다. 본질은 결코 남들이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남에게 비춰진 자신을 보고,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린 서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려 애썼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빗소리가 날 것 같은 조그만 손 편지에서부터 재미있던 비트들이 방 안 가득 찼던 섹스까지. 다가가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어떤 길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은색 기둥들. 너는 손 끝으로 가만가만 은색 기둥을 매만졌다. 손 끝에 살짝 잠긴 은색 기둥이 내는 조그만 울림들에 나는 이명을 느낀다.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고, 기타의 코드를 바꾸는 손과, 열쇠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 조그만 마당 위에 불던 바람.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너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찾아냈다. 흑백필름을 두 번이나 갈아 끼우고, 찍은 것 중 다섯 장 정도는 괜찮았을 거라 생각한 나는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자고 있는 너를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빨간 딸기를 꺼내어 자고 있는 너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자고 있던 너는 천연덕스럽게도 딸기를 꼭꼭 씹으며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우스워서 급히 카메라를 들고 한 장을 더 찍었다. 내 손 안에서 필름이 돌아 가는 소리가 났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필름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높다란 허무의 궁륭에서 거꾸로 무엇인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 중력을 잊은 기억의 분수 같은 소리. 의식의 궤양을 앓고 있는 도시가 내는 외침소리. 푸르른 횡경막의 네온사인이 낭창낭창 흔들리는 소리. 박살나는 아침의 소리 같은 소리. 그냥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
너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2층의 난간 위에서, 따뜻하고 몰인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무관심의 모호한 경계가 자라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다. 건물 안으로는 노을빛이 쌓여가고 있었다. 우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하늘 아래로 내려가는 태양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건물이 녹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물 바닥에 놓여진 사과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