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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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0 개 1,423 박건호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위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는 조금만 움직여도 소리가 발생하는 거대한 은회색 강당에 빨간 사과를 쥔 채 서 있었다. 너는 손을 들어 은색 기둥을 매만지고, 빨간 사과는 은색 기둥에 유난히 눈에 띄게 반사되어 마치 빨간 사과만이 이 강당 안에 홀로 부유하고 있는 듯했다. 너는 사과를 내려 놓았다. 거대한 소리가 강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과는, 조금씩 바닥 위를 구른다. 나는 2층의 유리난간에 기대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워져 버린 외로움 같은 것들이 하늘 위에서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넌 내게 그 때 우리가 없어져 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손을 꼭 잡고 끌어안고, 햇살로 가득 찬 옥상 위에서 넌 내게 우리가 이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랬다. 나는 너를 조금 더 끌어안는 것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건물 위에서 건물 아래의 너를 보고 있다. 사실 그 때, 우린 알고 있었다. 본질은 결코 남들이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남에게 비춰진 자신을 보고,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린 서로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려 애썼었다. 보기만 해도 예쁜 빗소리가 날 것 같은 조그만 손 편지에서부터 재미있던 비트들이 방 안 가득 찼던 섹스까지. 다가가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어떤 길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은색 기둥들. 너는 손 끝으로 가만가만 은색 기둥을 매만졌다. 손 끝에 살짝 잠긴 은색 기둥이 내는 조그만 울림들에 나는 이명을 느낀다.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고, 기타의 코드를 바꾸는 손과, 열쇠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 조그만 마당 위에 불던 바람.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너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찾아냈다. 흑백필름을 두 번이나 갈아 끼우고, 찍은 것 중 다섯 장 정도는 괜찮았을 거라 생각한 나는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자고 있는 너를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빨간 딸기를 꺼내어 자고 있는 너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자고 있던 너는 천연덕스럽게도 딸기를 꼭꼭 씹으며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우스워서 급히 카메라를 들고 한 장을 더 찍었다. 내 손 안에서 필름이 돌아 가는 소리가 났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퍼졌다. 필름이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높다란 허무의 궁륭에서 거꾸로 무엇인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 중력을 잊은 기억의 분수 같은 소리. 의식의 궤양을 앓고 있는 도시가 내는 외침소리. 푸르른 횡경막의 네온사인이 낭창낭창 흔들리는 소리. 박살나는 아침의 소리 같은 소리. 그냥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

너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2층의 난간 위에서, 따뜻하고 몰인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무관심의 모호한 경계가 자라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다. 건물 안으로는 노을빛이 쌓여가고 있었다. 우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하늘 아래로 내려가는 태양을 나는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건물이 녹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건물 바닥에 놓여진 사과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화이

댓글 0 | 조회 2,315 | 2014.02.25
영화 <화이>. 다섯 명의 아빠 중 한 명인 석태가 아들 화이에게 말한다. 괴물이 두렵다면 괴물이 되거라. 괴물이라는 생명체에 대한 믿음은 순수성의 증… 더보기

서바이벌

댓글 0 | 조회 1,716 | 2014.02.12
지금은 묻혀버렸지만, 작년 11월쯤 한국의 엠넷에서 작곡가 서바이벌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었다. 티비를 안 보아서 홍보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4회 만에 … 더보기

한국에서

댓글 0 | 조회 1,757 | 2014.01.30
2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부산스럽지만 깔끔한, 이용자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하여 만든 회색빛의 거대한 이동체. 사람들은 세포처럼 … 더보기

모자이크(Ⅲ)

댓글 0 | 조회 1,811 | 2013.12.24
호텔의 방. 창가 태양의 광선이 대기를 통과하고, 산란된 빛의 파장은 곧게 흩어져 호텔의 창가에 곱게 내려앉아있다. 먼지들이 빛의 언저리를 떠돌고, 창틀에 반쯤 … 더보기

모자이크(Ⅱ)

댓글 0 | 조회 1,225 | 2013.11.27
호텔 앞의 해변 아침에 일어나 담배 연기같은 차가운 태양이 빛나는 바다를 보았다. 빨간 투명함이 내리쬐는 백사장엔 무덤 하나가 있었고 그 위의 크림빛 소녀는 고개… 더보기

모자이크(Ⅰ)

댓글 0 | 조회 1,248 | 2013.11.12
호텔의 1층 아무도 없는 호텔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20세기 초의 미국. 시간에 엑스레이를 찍는 직업이 있었다. 소들과, 알 수 없는 짐승의 먼지 쌓인 뼈들을 … 더보기

지느러미

댓글 0 | 조회 1,449 | 2013.10.22
1. 나는 몇몇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허세, 조작, 이기가 엉켜서 나 스스로도 통제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연출하는 것은 나의 처세가 되었었… 더보기

피곤한 고양이

댓글 0 | 조회 1,695 | 2013.10.08
영화학과 출신이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학시절, 학과 공부는 잘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화와 관련된 종합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편협하긴 해도- 나름대로 공부… 더보기

칼럼

댓글 0 | 조회 1,703 | 2013.09.24
칼럼. 칼럼이란 것을 쓴 지 1년이 되었다. 그 뜻은 내가 여기 온지 1년이 조금 넘었다는 뜻일 것이다. 2012년 6월 초순,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로 뉴질랜드로… 더보기

이사

댓글 0 | 조회 1,890 | 2013.09.10
저번 주였다. 내가 사는 플랫의 인터넷이 일주일 남짓 먹통상태일 때였다. 일주일 내내 플랫메이트들을 볼 때마다 얘기를 했다. 난 인터넷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 더보기

Boy A

댓글 0 | 조회 1,387 | 2013.08.28
초록빛 눈이 오는 날이다. 회개하기 위하여 떠나기가 쉽지가 않아 흔들흔들거린다. 너를 떠날 수 있는 날, 그리하여 다시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년은 늘 … 더보기

너의 스위치였다

댓글 0 | 조회 1,639 | 2013.08.14
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 더보기

카페

댓글 0 | 조회 1,975 | 2013.07.23
17살. 나는 카페에 자주 갔었다. 스타벅스, 카페베네 등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오기 전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가게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2층에 있었던 그… 더보기

풋내기의 솔직한 노래

댓글 0 | 조회 1,545 | 2013.07.09
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람이 빡빡해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팍팍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관용구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 더보기

외롭고, 의존적인 사람들

댓글 0 | 조회 5,758 | 2013.06.26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보통 잠이 오지 않으면 가까운 바닷가로 나가 혼자 돌아다니다 오곤 한다. 핸드폰은 꺼두고 엠피쓰리만 켜두고 이곳저곳 쏘다닌다. 그런데 그것…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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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544 | 2013.06.11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 더보기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의성에 대하여

댓글 0 | 조회 1,404 | 2013.05.28
기차에서 피가 났다, 레일에서 피가 굉음을 내며 흐른다. 줄줄줄줄줄줄줄줄 흐른다 Medina의 You and I를 듣는다. I feel like. I’…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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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 조회 1,391 | 2013.05.14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오월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광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암울한 느낌을 5월이라는 봄 냄새 가득한 단어로서 상… 더보기

음악시간

댓글 0 | 조회 1,441 | 2013.04.24
다음 주까지 각자 음악적인 재주 하나를 가져오면 되는거야. 중학교 시절, 미치광이로 유명했던 음악 선생이 말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어렵다며 불평불만, 투덜투… 더보기

얼굴

댓글 0 | 조회 1,343 | 2013.04.10
영화 <접속>, <공감>,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수많은 애틋한 만남들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미필적 대본 속 우연들이 교집… 더보기

현재 소리

댓글 0 | 조회 1,424 | 2013.03.26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 더보기

적과 빛

댓글 0 | 조회 1,236 | 2013.02.27
그 일은 2011년 3월 중순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났다. 일종의 컨설팅 회사가 내가 다니던 대학교를 한 번 다녀갔고, 이틀 뒤 한 강사 분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 더보기

배탈

댓글 0 | 조회 1,488 | 2013.02.13
몇 년만에 아픈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것은 군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지금이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3일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보기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댓글 0 | 조회 1,482 | 2013.01.31
1.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찍은 단편영화: 늦어도 2월까지는 편집 완료! 2. 랭귀지 스쿨에서 한국말 가르치기: 교재 제작! 3. 정착: 워크비자 준비할 것! 4. … 더보기

크라이스트처치 기행 메모

댓글 0 | 조회 1,381 | 2013.01.15
1. 백패커. 나는 1층에 있었고 호주에서 왔다는 한국인은 2층에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할로겐 조명을 켠 채 노트북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