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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10. 17:17 NZ코리아포스트 (219.♡.23.25)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식장은 포도 농원이었다. 오클랜드 남쪽으로 두 시간쯤 달려간 뒤 구불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은 산 길을 20분도 넘게 또 갔다. 이런 곳에서 무슨 결혼식,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온 것 아닌가, 흙먼지는 왜 이렇게 날리는지, 심란하던 차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눈 앞에 햇살 가득한 포도농원이 펼쳐진 것이다. 식장은 화려한 꽃들로 치장되었고 흰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샴페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악 3중주단의 연주는 결혼식을 한층 격조있게 만들었다.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받아들고 초록 융단처럼 펼쳐진 고혹적인 포도밭을 목을 길게 빼고 내려다 보았다.
‘낭만적인, 너무나도 낭만적인 결혼식이다! 나도 금혼식 때 포도밭에서 결혼식을 올려볼까나?’
피로연은 우리 부부의 이름이 놓여진 테이블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것이었다. 스크린에서는 신랑신부의 성장 과정이 담긴 영상이 영화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또 다른 결혼식 풍경.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왔다갔다 하고 아이가 에엥- 울어대기도 했다. 입구에서 축의금을 받고 있어서 미처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당황했다. 한국에서 이틀 전 도착한 신부네 식구들은 사뭇 서먹서먹한 표정이다. 피로연은 종교 기관의 넓은 친교실에서 열렸다.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신랑쪽 어머니와 그 친구들이 정성껏 차린 음식들이 푸짐했다. 우리는 일회용 접시를 들고 마음껏 음식들을 담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피로연을 즐겼다. 돌아올 때는 떡도 한 봉지 얻었다. 왁자지껄하고 풍성한 잔칫집 풍경이었고 하객들은 ‘잘 차렸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신부 쪽 부모의 생각은 달랐다.
신부의 부모가 나를 보자고 했다. 신부 어머니는 섭섭함을 얘기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신부 아버지도 울었다. 하객들이 선 채로 음식을 먹는 모습이 한국서 온 부모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섭한 마음을 가득 담고 딸을 외지에 두고 떠나는 부모 마음이 오죽할까, 이유야 어찌됐건 나도 눈물이 났다.
‘---Your mother was crying, Your father was crying, And I was crying, too.’ Patti Page의 ‘I went to your wedding’ 처럼 우리 모두 울었다. 노랫 속 남자는 사랑하는 애인을 보내면서 자신의 행복도 끝이라며 가슴이 찢어져서 울고, 여자의 부모는 딸을 보내면서 가슴이 뻥 뚫려서 울고, 나는 그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 같아서 울었던 것이다.
우리 옆 집 마오리 BUNNY는 아들만 여섯인데 얼마 전 넷째가 결혼했다. 장소는 BUNNY네 집 앞뜰이자 우리 집 옆뜰이었다. 30평 남짓한 정원에 50여명이나 되는 하객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찼다. 마오리 지도자가 혼자 사회도 보고 주례도 섰다. 30여분만에 결혼식이 끝나고 행복한 웃음 속에 와인 파티가 이어졌다. 우리는 선물로 와인 한 병을 들고 갔었다. 참석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지 그날 이후로 BUNNY는 우리만 보면 두 팔을 벌리고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행복을 뽑아낸 BUNNY는 다섯째 아들의 혼례도 우리 집 옆뜰에서 치를 것 같다.
교민들의 결혼 문화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단촐하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함을 보내거나, 신부가 시댁 어른들에게 드리는 폐백도 생략된다. 예단이라든지 예물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줄어 들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자녀의 혼사를 치르는 경우, 문화적 충돌이 빚어진다. 신부가 컨테이너로 혼수감을 실어왔는데, 남자가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크게 실망했다, 신부의 목덜미나 손가락에 값어치 나가는 보석이 없어서 혼례 후 창피했다. 시어머니 예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섭섭했다, 폐백을 왜 하지 않느냐, 등등의 문제다.
한 번은 장례식에 갔었다. 여든 되신 지인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새 때문이었다. 새들이 아침 일찍부터 꽥꽥되면서 울자 댓돌 위에 올라가서 새들을 쫓다가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셨다. 앞에는 벽이 있었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가면서 --- 끔찍한 애처가였던 아버님은 어머님의 아침 단잠을 깨우는 새들을 쫓다가 변을 당하신 것이다. 국화 꽃 한 송이를 아버님 품 안에 놓아드렸다. 아버님은 유모차 안, 포대기에 싸여 잠든 아기처럼 관 속에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영면하고 계셨다.
이민 와서 정신없이 살다가 돌아보니 어느 새 아이들은 훌쩍 커있다. 우리 자녀들이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결혼하고 살아갈 것인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세 번의 결혼식보다 한 번의 장례식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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